홍준형 < 서울대 교수ㆍ공법학 > 핵무기보유선언으로 북한은 6자회담의 굴레를 벗고 자신이 가진 모든 카드들을 구사할 수 있는 입지를 일단 확보한 것 같다. 외교적 해결이라는 수사 아래 '폭정의 전초기지'를 '체제전환'쪽으로 몰아가려던 미국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의표를 찔리고 선공을 당한 셈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도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4일 국정연설에서 북핵문제의 근본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며 일관된 원칙에 따라 차분히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우려의 빛이 역력하다. 한·미·일 협의 등을 통해 6자회담에 지체 없이 복귀할 것을 촉구하기는 했으나, 북한의 대응은 여전히 미지수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보유선언이란 '벼랑끝 전술'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핵무기보유선언으로 미국의 선제정밀타격 위협에 대한 경고판을 내건 셈이고, 핵무기개발과 관련해 하던 일을 계속 할 수도, 중국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6자회담에 복귀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는 카드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 자기편이라 믿었던 미국의 약을 올리고 그 결과 미국 내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정작 최악의 상황은 정책결정과정에서 북핵문제의 우선순위가 밀려 외교적 처리가 지연되다가 잘못된 결정으로 파국에 이르는 경우다. 94년보다도 훨씬 심각한 한반도 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를 사수하고 혁명수뇌부를 보위하자며 집안단속에 열을 올린다 해도 그런 상황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북한의 요구는 첫째도, 마지막도 체제의 안전보장이다. 그 다음, 아니 바로 체제안보를 위한 군대 유지를 위해 극심한 에너지·전력난을 극복하고 경제상황을 호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에너지 문제 해결을 위해 원자력발전을 추진하는 것은 남조선이나 일본 등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극히 당연한 주권사항이라 여길진대, 이를 미국이나 주위 국가들이 핵연료재처리 위험을 들어 제지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고 만일 그러려면 의당 핵 포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거 제네바기본합의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둘러싼 협상과정에서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이야기와 하등 달라진 게 없다. 현재의 능력이나 여건에 비추어 북한이 외부의 도움 없이 에너지난이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핵무기든 미사일이든 자신이 가장 능한 상품을 팔아 필요한 자본을 대려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뜻에서 북한이 가장 반기는 것은 금강산관광사업처럼 정치와 무관하게 안정적 현금수익을 보장하는 사업이나 비료 연탄 등 직접적인 물자 지원이다. 반면 북한은 체제 존립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한 군사적 방어장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결국 이번 선언으로 핵무기보유를 공인 받는 동시에 향후 적절한 시기에 6자회담에 복귀해 핵동결이든 폐기든 협상을 통해 에너지 등 경제 지원을 얻어낼 수 있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알 순 없지만 북한인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지는 못할 가능성이 크고 당면한 후계문제도 원만히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북한체제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내부로부터의 불안에서 자유로워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북한정권이 내외의 위험과 싸우는 과정에서 북한 인민은 또 얼마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할까. 북한 지도부가 정녕 인민을 생각한다면 살신성인의 로드맵을 짜 민생을 살리기 위한 경제개혁과 개방, 그리고 민주적 이행을 향한 장정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고 또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야당의 대표가 최근 영토적 통일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밝힌 것은 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