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석자 ] 홍윤희 옥션 홍보팀 과장 김근만 이마트 마케팅팀 과장 이순순 현대백화점 명품팀 차장 정동혁 롯데백화점 여성캐주얼 팀장 왕일웅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사장 백화점 할인점의 구매 상품기획 마케팅 홍보분야 실무 책임자들이 강북의 조그만 바에 모인 것은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지난 24일이었다. 차가 막히는지 약속시간이 지나도 자리가 차지 않자 상사 눈치를 보며 일찍 나왔다는 한 사람이 투덜거린다. 대화는 경기 타령으로 시작됐다가 누군가 새해 희망 이야기부터 하자고 제안했지만 푸념을 털어놓으려는 분위기를 돌려놓지 못했다. 여성의류 매입만 15년째인 롯데백화점의 정동혁 팀장이 운을 뗐다. "올해는 '마이너스 매출'에 대한 중압감이 굉장했어요. 매일 아침에 전날 매출자료를 갖고 회의를 하는데,거의 도살장에 끌려나가는 소 같았어요. 머리 빠지는 속도도 갑작스레 빨라지고 유통업계에 몸담은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죠." "정상적인 판매가 이뤄지지 않은 게 더 문제였습니다. 내수 불황이 극심해지다 보니 사은행사,바겐세일,또 사은행사 이런 식이었죠.아시다시피 '사바사바'로 1년을 보냈습니다. 세일간 간격이 20일 이상이면 되니까 눈치보기 경쟁식으로 세일만 연발했지요. 결국 고객 기대치만 올려놨습니다."(현대백화점 이순순 차장) # 세일 또 세일 세일 이야기가 나오자 할인점 직원들이 한마디 거든다. "일선 매장에서는 우리는 왜 세일을 안하느냐고 본사를 힐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항상 최저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할인점이 세일을 실시한다면 고객들에게 가격에 대한 혼란만 부채질한다고 봤죠."(이마트 김근만 과장) "공식적으로 얘기는 안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종 행사를 통해 30∼50% 세일해 온 게 사실입니다. 할인점이 세일을 염두에 두고 정상가격을 높이 책정하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받을까 내심 걱정됩니다. 연말을 앞두고도 여러 행사를 많이 준비했는데 실적은 저조하게 나와 정말 골치 아픕니다."(홈플러스 왕일웅 차장) 모두들 매출로 스트레스받는다고 한 마디씩 하자 정 팀장이 '반신욕'이 해법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스트레스로 지난 5월 반신욕을 시작했어요. 맘도 편해지고 기분에 머리도 나는 것 같더라구요. 10년 넘게 있던 발의 티눈도 저절로 빠졌어요. 실적 때문에 팀원들을 많이 깨는데 요즘은 직원들을 근처 찜질방으로 데리고 가 반신욕을 함께 하고 감정을 풉니다." 얘기는 '웰빙'으로 이어졌다. "남편한테 평소에 와인바 같은 데 가자고 하면 '돈이 썩었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어요. 그런 남편이 올해 유럽 출장을 한번 다녀오더니 사람이 확 바뀌더라구요. 한 백화점 와인 매장을 찾더니 3만5천원짜리 와인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떡하니 사는 거 아니겠어요. 웰빙 바람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옥션 홍윤희 과장) 너무 얘기가 소프트하게 흐르는 것 같았는지 홈플러스 왕 차장이 "대형 유통업체가 중소상인 재래시장 상인들을 죽인다고 올해 참 말들이 많았다"며 화제를 돌렸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제는 소비자가 할인점을 원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대기업 중소상인들이 공생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정부에만 기대고 자금지원을 바란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 대기업.중소상인 공생을 하지만 홍 과장은 걱정말라는 눈치였다. "옥션은 재래시장 같은 곳에 마케팅을 많이 해서 '그렇게 살기 어려우면 옥션에서 팔아보라'고 캠페인하고 있어요. 성공사례가 많아서 자신이 생겼죠.중소상인들 문제하고 맞물리다 보니 자연스레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 되더라구요." 그는 옥션에서 생식을 팔다가 품목을 동대문 의류로 넓힌 상인도 있다고 소개했다. "동대문에서 두달동안 상인들의 은어도 익히는 등 엄청 노력한 사람이었어요. 온라인이란 유통 채널은 다양한 크로스오버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죠." 롯데 정 팀장도 공생 사례를 소개했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 최근 동대문 브랜드 4개를 들여놓았다는 것.올해 16개 여성 캐주얼 브랜드가 나자빠졌는데 거꾸로 재래시장 브랜드를 백화점에 입점시켰으니 눈길을 끌만한 케이스다. 이 때쯤 이마트 김 과장이 "상품 공급업체에 대금지급 기일을 한달 가까이 앞당겨주고 있다"고 자랑하자,정 팀장은 "신세계 때문에 우리도 협력업체에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아 연말에 더 바쁘게 생겼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얘기가 무르익자 화제는 '내년에 유행할 소비시장의 키워드'로 옮겨졌다. 먼저 롯데 정 팀장이 고참답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퀄리티 프라이스(Quality Price) 입니다. 가격이 더 합리적인 선으로 내릴 거예요. 숙녀 정장 한벌이 60만∼70만원 해서는 고객들이 백화점을 다 떠나고 말겁니다. 합리적인 가격대로 조정되면서 품질은 적정선에서 맞추는 퀄리티 프라이스 제품이 내년 소비시장을 주도할 것 같습니다." 정 팀장은 실제로 캐주얼의류 메이커들 사이에 내년 봄부터 가격을 20∼30% 내리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달 넘게 세일하는 것보다는 아예 가격의 거품을 빼자는 것. 현대 이 차장은 명품팀에서 일하지만 이 말에는 동감을 표시했다. 소비가 양극화될 게 확실하기 때문.그는 신용불량 문제로 젊은 층의 소비가 줄어든 점이 이같은 전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마트 김 과장은 올해는 '웰빙' 트렌드 때문에 예측이 쉬웠지만 내년도는 감이 잘 안잡힌다는 표정이었다.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욕구는 분명 높아졌는데 소비여력은 없다는 게 딜레마죠.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소비자들이 합리적 소비를 했다고 느낄 수 있는 상품을 해외소싱 등을 통해 계속 제안하고 마케팅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 세일보다 거품부터 빼야 인터넷쪽에서는 저가일변도에서 벗어나 저가 중에서도 골라 사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홍 과장은 "옥션에는 9천9백원짜리 싼 상품이 많았지만 요즘들어서는 줄어드는 추세"라며 "20만∼30만원짜리 코트가 나와있을 정도로 뭔가 가치가 있다면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가진 고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맥락에서 '준 명품'이란 의미의 '매스티지(Masstige)' 제품이 내년에는 세를 더 넓힐 것으로 현대 이 차장은 내다봤다. 처음 얘기대로 '희망'을 공유하며 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옥션 홍 과장은 "자신을 온라인에 매물로 내놓아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뉴스도 있었지만 대학을 나와 옥션에서 판매자로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우리 때 같았으면 부모님 용돈이나 타 썼을 텐데,요즘 학생들은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젊은 세대들이 나중에는 더 잘될 것 같습니다. 시대를 잘타고 난 거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유통업계를 지원한 여성 신입사원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 인력이 남자와는 다른 안목으로 좋은 상품을 많이 기획하고 불황을 극복하는데 기여했으면 합니다." 현대 이 차장의 맺음말에 모두 구름속에서도 해가 가끔은 내비치는 한해가 되기를 박수로 기원했다. 글=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