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주가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연금운용은 지난해 '헤르메스의 원칙(The Hermes Principles)'이라는 것을 공개한 적이 있다. "…26마일을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기에서 관중들은 구간별로 내기를 하기도 한다. 다음 1마일에서는 누가 1등을 할 까? 물론 그 구간에서 1등을 하는 선수가 우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거리 기록에 집착한 나머지 오버 페이스를 하게 되면 그 선수는 시합에서 승리할 수 없다.…" 마라톤에서의 페이스 조절을 사례로 든 헤르메스의 투자 원칙에는 "기업 경영자들이 증권회사와 펀드 매니저들로부터 회사 주식의 단기적 성과 향상을 강요받지만 이는 주주들로부터 부여받은 선량한 재산관리인의 입장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자신들은 결코 단기차익에 집착하는 투기성 펀드가 아니라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는 장기 투자자라는 주장인 셈이다. 하지만 헤르메스의 그런 주장은 삼성물산 주식으로 '장난'을 치는 과정에서 명백한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헤르메스는 지배구조 개선을 내세워 삼성물산 경영진을 끊임없이 괴롭혔고,심지어 순진한 한 언론을 이용해 "지배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기업인수합병(M&A)을 시도하는 펀드를 지원하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흘렸다. 그 보도의 영향으로 주가가 뛰자 사흘도 안돼 주식을 전량 팔아치웠다. 헤르메스가 그렇게 해서 번 돈은 무려 2백여억원에 육박한다. 경영권 방어에 힘을 쏟은 회사와 추격매수에 나섰던 개미들의 피해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하며 SK㈜를 흔들고 있는 소버린자산운용도 헤르메스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신을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하는 장기 투자자'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 역시 '허울좋은 가면'일 뿐이다. 소버린은 지난해 7월 일본 4위 금융지주회사인 UFJ홀딩스 지분 5.11%를 취득,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소버린의 실소유주인 리처드 챈들러는 지난 2월 일본의 한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자신들의 평균 주식 보유기간은 4년이 넘고 일부 주요 투자주식은 10년 넘게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버린은 반년도 안된 지난 7월 UFJ홀딩스 지분을 3.91%로 줄였다. 8만엔 하던 주가가 44만엔까지 올랐을 때다. 한국에서라고 다를까. UFJ홀딩스 지분을 보유한 소버린 산하 민트증권은 2001년 말 현대해상화재 지분 9.86%를 매입,3개월만에 전량 처분하면서 큰 이익을 챙겼다. 역시 소버린 산하이자 현재 SK㈜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크레스트증권도 2001년 11월 2% 안팎의 국민은행 지분을 취득했으나 이듬해 4월 모두 매각했다. 아무리 장기투자자라고 믿어주려 해도 그럴만한 구석이 보이질 않는다. 어차피 펀드의 목적은 투자 효과의 극대화다. 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거나 윤리경영을 투자 테마로 잡았다는 주장은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KT&G에 대해 자사주를 전량 소각하지 않으면 소버린과 연대해 경영진을 갈아치우겠다고 협박한 영국계 TCI펀드도 아프리카 빈곤 아동 지원을 투자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투기펀드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데 이렇다할 제재 수단은 없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경영권 방어를 걱정하는 재계의 의견을 눈꼽만큼도 반영하지 않은 채 국회를 통과했다. 소버린의 '10%룰' 위반 혐의도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검찰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됐다. 삼성전자가 SK㈜의 백기사로 나섰다고 한다. 결국 국내 기업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는 일 뿐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김정호 산업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