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불법파업을 펼치며 노동계의 '공격수'로 나섰던 LG칼텍스정유 노동조합이 며칠전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는지 대의원들 대부분이 탈퇴쪽에 찬성표를 던졌다. 파업주동자 8명 구속,파업 기간 중 무노동무임금 적용,노조간부 26명에 대해 손해배상 29억원 청구소송 중….20일 넘게 벌인 파업의 성과물들로,실속은 하나도 없고 잃은 것 뿐이다. 여기에다 무분별한 파업에 대한 국민적 비난까지 합하면 노동조합이 입은 유·무형의 손실은 실로 엄청나다. LG칼텍스 노조의 민주노총 탈퇴는 결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다. 노동현장에서 일고 있는 커다란 변화의 흐름이 반영된 것이다. 올해 전투적 조합주의가 현장에서 맥을 못춘 것은 안정을 바라는 조합원들의 정서가 투영된 결과다. 일반 조합원들이 명분 없는 지도부의 투쟁노선에 등을 돌리는 것은 이제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지난 7월 서울지하철노조 지도부가 파업을 주도했을 때 많은 조합원들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명분 없는 투쟁엔 참여할 수 없다"며 파업 대열에서 이탈,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노조 지도부가 섣불리 파업을 강행하다 망신을 당한 케이스다. 한때 국내 노동운동을 이끌며 '실세' 행세를 했던 현대중공업 노조는 사내하청 비정규직 근로자의 자살 문제를 놓고 민주노총과 팽팽히 대립하다 제명 당하는 길을 택했다. 개인 사생활로 죽은 근로자를 열사로 격상시키려는 민주노총의 요구에 무리가 있다며 반기를 들다 '자의반 타의반' 거세를 당한 셈이다. 노동현장에서 일고 있는 거센 변화의 바람에도 불구,우리 노동계는 여전히 고쳐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먼저 이념의 덫에 걸린 민주노총 내 강경파들의 움직임이다.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은 전체 노동자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지만 노동계 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며 매년 총파업투쟁 때마다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는 것도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갈 경우 투쟁력이 약화된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 선진국 노조들은 이미 이념의 덫에서 빠져나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에 더 몰입하고 있다. 독일 금속노조 산하의 많은 사업장들은 사용자의 '임금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요구를 잇따라 수용하며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일자리가 없어지든,경제가 어려워지든,앞뒤 가리지 않는 막가파식 투쟁은 이제 한국 외에 지구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됐다. 더욱 한심한 것은 좌파 대학교수나 노동전문가들이 책이나 학술지,강의 등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에게 투쟁을 지속적으로 주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 노동운동의 변화를 개량주의화,관료주의화됐다고 평가절하하면서 파업에너지가 넘쳐흐르는 한국의 노동계가 세계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논리까지 펴고 있다. 바로 이런 주장들이 민주노총 내 강경세력의 이념적 젖줄 노릇을 하며 투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연봉을 자랑하는 LG칼텍스 노조가 파업을 벌였던 것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강경세력의 사주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마르크스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지금,아직도 "만국의 노동자여,단결하라!"는 좌파들의 외침이 우리 노동현장에 울려퍼지고 있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나 보내야 할 이런 철 지난 이데올로기가 노동현장에 득세하는 한 한국 경제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기업도 변하지만 노동계도 달라지고 있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려면 낡은 이념에 물든 노조지도부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