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방어수단으로 재벌그룹 오너에게 `차등의결권'을 부여하는 문제를 놓고 경제계에서 논란이일고 있다. 차등의결권이란 기업의 지배주주에게 보통주의 수십배에서 수백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주는 것으로 북유럽 일부 국가가 자국기업의 경영권 보호차원에서 도입한 제도다. 상법상 `1주 1의결권'을 금과옥조로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생소한 제도이지만 최근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적대적 M&A가 우려된다는 재계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도입 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주주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원칙적' 측면과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장주식을 차등화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적' 측면이 맞물리면서 실현가능성이 낮다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 차등의결권 북유럽서 성행=최근 폐지 논의 세계적으로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나라는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프랑스 등 주로 유럽국가들이다. 외국자본의 M&A에 대한 방어차원에서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1천배에 달하는 차등의결권을 지배주주에게 주고 있다. 이에 따라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슨의 지배주주인 왈렌버그 가문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트사의 지분 가운데 19%만을 보유하고 있으나 차등의결권을 이용해 41%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도 포드 등 일부 제조업체와 `구글' 등 신흥 벤처기업들이 적대적 M&A로부터 효율적인 방어벽을 구축하기 위해 속속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EU(유럽연합)내에서 폐지여론이 거세다. 기업인수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을 보장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는 폐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 실제로 독일은 지난 2000년 6월 이 제도를 폐지했다. EU 집행위원회도 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재계, "M&A 방어 차원서 차등의결권 불가피"=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가 적대적 M&A에 노출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차등의결권 도입이 불가피하다는게 삼성과 재계의 주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전인식 과장은 "선진국과는 달리 국내 기업들은 마땅한 경영권방어수단을 갖지 못해 자사주 매입과 같은 현금투입형 방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서 "M&A 방어수단으로 차등의결권을 도입하는 방안이 적극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측도 효율적으로 M&A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삼성전자의 지배주주인 이건희회장에게 차등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달 발행한 '외국자본의 국내진출 동향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국자본의 국내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적대적인 M&A 위험 증가로 기업들의 경영권 불안이 가중돼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면서"유럽 등 선진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차등의결권주 제도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실현가능성 높지 않아= 그러나 실현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는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우선 우리나라 상법은 `1주 1의결권'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이를 개정하지 않고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하는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주주들의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소액주주들이 과연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장주식을 차등화하는 것은 기존주주들의 반발을 살 우려가 크다. 방송대 김기원 교수는 "상식적으로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장주식을 차등화한다는 것은 기존주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거의 불가능하다"고봐야 한다"며 "특히 이미 우선주와 보통주로 차등화해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돼있는 상황이어서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말했다. 정부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소관분야는 아니지만 증권관련 법률로 적대적 M&A 방어제도의 도입여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차등의결권을 도입하면 소유지배구조간 괴리가 커지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국가들도 기업경영권 시장의 작동을 저해한다고 해서 폐지가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계열사의 출자 등에 의해 과도한 소유.지배간의 괴리가 문제되는 우리나라 재벌시스템 하에서 차등의결권 제도의 도입은 소유.지배간의 괴리를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깊은 검토가 필요한 과제"라며 " 기존주주들에 대한 이익침해 문제와 유럽국가와의 법제상 차이 등이 있어 쉽지 않을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19일 열린 국회 정무위의 공정거래위 국감에서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은 차등의결권 부여와 관련, "특정 사기업에 대한 시혜적 특혜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국민적 동의와 유럽에서 취했던 사회협약 수준의 조건이 전제될 때 개방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재계가 이처럼 차등의결권 도입논의를 유도하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재벌 금융.보험사 의결권 축소를 골자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저지하려는 여론조성용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기자 rhd@yonha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