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호(盧岐鎬.57) LG화학 사장은 1백81cm의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군살 하나없는 몸매에다 언제봐도 변함 없는 부드러운 미소는 일상적인 절제가 체화됐음을 잘 보여준다. 노 사장은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30여년의 직장생활 동안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에 없고 못한 일만 가슴에 남아있다고 한다. 회사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항상 중심에 서 있었지만 "내가 아니라 모두 조직이 한 일"이라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노 사장의 원래 꿈은 대학교수였다. 보성고와 한양대 화공과를 나와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혼자서 가계를 꾸려가느라 오랫동안 고생해온 어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취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노 사장의 부친은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노 사장이 LG화학(당시 회사 이름은 락키화학 공업사)에 입사한 것은 73년8월. 비닐류의 "꽂장판"에서 PVC(폴리염화비닐)재질의 "모노륨"으로 우리나라 장판의 세대교체가 시작되기 바로 2년 전이다. 모노륨은 비닐보다 훨씬 탄력이 강하고 질겼다. 또 코팅기술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어 꽃무늬 일색의 장판에 나무 대리석 등의 다양한 무늬들을 첨가하는 게 가능했다. 이 제품은 당시 아파트 건설붐을 타고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고 LG화학은 시장의 최강자로 올라섰다. 노 사장은 플라스틱 사업부에 배치돼 바로 그 모노륨에 대한 제품 기획업무를 맡았다. 전시회를 다니며 해외 샘플들을 수집하고 제품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 건설업체들을 돌며 시장조사를 마치고 나면 영업과 연구·개발 담당을 한자리에 모아 기획회의를 열었다. 대충 하자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고 제대로 하려면 끝도 없는 것이 기획 업무다. 시키는 일만 하다간 늘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전략적으로 사고할 줄 알아야 하고 논리와 분석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노 사장은 탁월한 기획통이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또는 통근길 버스 안에서든 모든 사고의 중심은 일이었어요. 일 자체를 즐기려고 했고 될 수 있으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창의적인 일을 많이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는 술자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일로 회사나 조직에 불평을 하면 슬그머니 일어서곤 했다. 고교 동창 박노빈 삼성에버랜드 사장은 "기호는 원래 차분한 성격에 속이 깊었다"며 "서로 다른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가끔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업무에 대한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수많은 기획업무에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다. 입사한지 10년 만인 1983년, 부장으로 승진했다. 첫 프로젝트는 말레이시아에 대한 합작투자.과장 시절부터 추진해왔던 말레이시아 투자건은 회사 최초의 해외합작투자라는 측면에서 회사는 물론 그룹에서도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사업이다. 양측 경영진들이 서울과 콸라룸푸르를 오간 끝에 합작 서명식이 이뤄졌다. 하지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합작 거래처가 갑자기 부도가 나버린 것.합작사업은 당연히 무산됐으며 적잖이 투입된 초기비용은 그냥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노 사장은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당시 사업본부장은 완벽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던 성재갑 LG석유화학 회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묵묵히 일만 하던 사람을 한때의 실수로 문책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일이 잘못된 데 대해 자책을 많이 했습니다. 중요한 해외투자를 앞두고 사전조사를 엉터리로 한 것이지요. 쇠방망이로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결과적으로 그 때의 경험은 노 사장에게 철두철미한 일처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90년 초 그는 LG석유화학 구매부장으로 잠깐 자리를 옮겨 나프타 분해시설(NCC) 관련 공장 건립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순조롭던 공장건립은 증류탑을 공급키로 한 협력업체의 전면 파업으로 돌연 삐긋대기 시작했다. 증류탑이 제때 설치되지 않으면 공장 완공 자체를 미뤄야 할 판이었다. 협력업체 입구 곳곳에 진을 친 파업 노조원들을 뚫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협력업체의 노사 양측 모두를 설득해야 했다. 증류탑을 옮길 수 있는 타워 크레인 열쇠는 노조가 갖고 있었고 크레인을 움직이려면 회사 측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파업은 당신들의 자유지만 원청회사에 피해를 주면 노조의 입지도 약화된다'고 진지하게 얘기했지요.'원청사로서 노사 교섭이 원만하게 타결되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으니 증류탑은 갖고 가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더니 노조가 열쇠를 내주더군요." 열쇠를 받아들고 회사측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노 사장 일행은 1백m가 넘는 증류탑을 울산 앞바다의 바지선에 옮겨싣고 여수 공장까지 끌고오는 데 성공했다. 노 사장은 입사 18년 만인 91년 이사가 됐다. 노 사장은 바둑으로 치면 초반보다 종반이 더 강한 스타일이었다. 일을 무리하게 벌이지는 않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은 확실하게 끝을 봤다. 장식재사업부 유화사업본부 등 맡았던 사업들을 모조리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으며 승승장구했다. 97년엔 중국지역본부장(전무)으로 나가 시장을 직접 분석하고 미래 사업 타당성을 검토,중국 진출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2010년까지 중국에 현재의 LG화학과 같은 회사를 하나 더 만들겠다"는 노 사장의 공언은 그 시절의 직접 체험을 통해 다져진 것이다. 노 사장은 99년 화학업계 최대 규모의 외자유치(2억5천만달러)를 통해 설립된 'LG다우 폴리카보네이트'의 초대 사장을 맡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이 시기의 경험을 노 사장은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1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다우의 선진경영 기법과 기업문화를 배우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2001년 4월 LG화학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된 이후 줄곧 강조하고 있는 '열린 경영'에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특유의 성향과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에 눈 떴던 경험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장이 되고 나서도 그는 담담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면 임원 정도는 될 줄 알았지만 CEO가 된 것은 본인의 의지나 노력 외에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노 사장은 지난 30여년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해온 사람이다. 흔들리는 통근버스 길에서도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기 위해 골몰했다. 퇴근 길의 소주 한잔도 마다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름의 성취감을 맛보았다. "과거의 자질구레한 성공 경험은 모두 잊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특히 사장이 한순간 잘못 판단할 경우 회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 만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노 사장의 이 한마디에 유별나게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지 않는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주위의 평가나 승진 따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직장인의 가장 이상적인 덕목으로 꼽는다. "성실하게 일에 몰입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옵니다. 가끔씩 '나는 왜 이번 승진에서 누락됐느냐'고 따지는 직원들이 없지 않은데 조직생활에는 시운(時運)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한 능력입니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