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중국의 금융긴축 이후 상황을 둘러보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발길이 산둥성과 동북3성 방향으로 옮겨지면서 조선족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러시아와 청국 간에 베이징협약이 체결되고 만주가 중국에 공식 편입되면서 시작된 조선족의 역사는 지금은 어디쯤을 달려가고 있을 것인가.

베이징 시내를 몇 겹으로 에워싸고 달리는 환상(環狀)도로의 세 번째, 즉 '3환'에 우뚝 서있는 타퉁타샤 빌딩 뒤엔 열악하기 짝이 없는 후미진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름하여 가오리잉(高麗營).

동북3성으로부터 밀려내려온 가난한 조선족들이 밀집해 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객지 생활에 지친 한국인 사업가들도 이곳으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꿈에 부풀어 중국에 왔지만 사업에 실패해 오갈 곳이 없어진 그런 사람들이다.

해가 저물면 마치 유령처럼 이곳 싸구려 주점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현지에서는 신조선족이라는 뜻으로 '신차오런'(新朝人)이라고 부른다.

실패한 사람이 언제나 성공한 사람보다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 신차오런은 앞으로 급속하게 불어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성장과 더불어 몸을 일으켜 이미 적지 않은 부(富)를 축적해가고 있는 조선족 기업가들도 중국 전역에서 줄지어 태어나고 있다.

"칭다오에만도 1천명이 넘는 조선족 기업가들이 있습니더. 기천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큰 공장도 즐비하고예"라고 말하는 이는 '청도농일식품유한공사'를 운영하는 조선족 김철웅씨다.

그의 경상도 사투리가 재미있다.

흑룡강신문의 이진산 사장은 지도를 펴서 신의주를 기준으로 아래위를 접으면 정확하게 조선족의 출향지역별 이주지역이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함경도 사람은 가까운 옌볜으로, 경상도 사람은 멀리 헤이룽장으로 이주해 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헤이룽장성에서 자란 김철웅씨는 부모가 경상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경상도 사람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그가 경영하는 '청도농일식품'은 고추장 된장 김치 라면 건재료 등을 반제품 형태로 만들어 한국에 수출한다.

종업원 5백명에 공장 부지만도 1만6천평에 이르는 회사다.

해찬들 중국법인에 입사했다가 4년동안 비즈니스 공부를 한 다음 독립해 일군 사업체다.

"북한산 고추가 어디 있습니꺼. 전부 중국산입니더"라며 한국 관세 제도의 복잡성을 지적하는 김 사장은 중국 농산물의 한국 수출길을 장악해 거부(巨富)를 일구어갈 태세다.

한국에서 닭꼬치구이로 유명한 '투다리'의 중국 글자는 '土大力'이다.

한용태 사장은 투다리 중국법인에 입사해 역시 독립했다.

독립 당시에 두 개 점포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중국 전역에 15개의 지사를 두고 80개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요식업 재벌이다.

"한국서는 간이주점 형태이지만 중국서는 정찬을 제공하는 식당으로 영업전략을 바꾸게 됐다"고 설명하는 그는 투다리에 입사하기 전 19년 동안 시골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다.

조선족 골프협회는 올해로 5회째 조선족 기업가 골프대회를 열고 있다.

한 번 대회를 열면 중국 전역에서 3백명 이상 참가한다.

지난 6월엔 그 중 80명이 제주도까지 원정 골프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들은 신중국인이면서 동시에 신조선족들이다.

이런 사람들 역시 꾸역꾸역 늘어나고 있다.

한국 비즈니스뿐 아니라 중국 내수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하는 조선족도 많다.

이들의 등장이 벌써 예사롭지 않다.

산둥성 지역에 사는 조선족 숫자는 벌써 15만명에 달한다고 이진산 사장은 말했다.

이 사장은 동석한 조선족 기업인들에게 신문부수도 늘려주고 광고도 많이 게재해 주기를 몇 번씩 부탁했다.

그 역시 이미 시장경제 하의 언론사 사장이었다.

칭다오 지역 조선족은 한국인 1명에 3명꼴로 불어나고 있다.

한국을 다녀온 조선족 동포의 대부분도 옌볜이 아닌 칭다오로 정착한다.

중국의 부상과 한국의 진출을 타고 이들 조선족들도 대이동을 하고 있다.

정규재 부국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