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홍 < 서울보증보험 사장 jung45@sgic.co.kr >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 같다.

'무언(無言)의 다수(多數)'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선뜻 참여했지만,글재주가 없어 두렵고 송구한 마음이다.

오늘은 오래 전 런던에서 들은 얘기 하나를 화두로 삼고자 한다.

런던 근교에는 오랜 전통의 명문학교인 '이튼스쿨'이 있다.

영국을 끌고 가는 지도층의 25% 정도가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정치가 행정가 법률가 교육자 역사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이 학교가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오랜 전통의 우아한 교풍 덕분에 명문학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튼'은 학생들에게 "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말라,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돼라,약자를 깔보지 말라,남을 비방하거나 음해하지 말라,그렇지만 공적인 일에는 용기있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돼라"고 가르쳐 왔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마지막 한 구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남과 더불어 사는 방법,즉 남을 배려하는 생활 태도를 어릴 때부터 익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학생들이 지도자로 성장했으니 '젠틀맨십'이 꽃을 피우고,옳은 일에 승복하는 멋진 가치관이 뿌리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부럽다.

그리고 멋지다.

자기 이익만을 챙기기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식으로 사생결단을 내고야마는 우리사회의 갈등구조를 보면서 더욱 부러운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사회는 갖가지 갈등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알맹이 없는 이념 갈등,상생이 아닌 공멸에 열을 올리는 노사갈등,나라보다는 내 고향을 앞세우는 지역갈등,학력격차와 빈부격차가 빚어낸 계층간 갈등,여기에다 세대간 갈등까지….안타깝다 못해 답답한 심정이다.

이 모든 추하고 볼썽사나운 것들을 한방에 날려 보낼 묘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이튼의 교풍'이 해답이다.

이제부터라도 나 말고,우리 말고도,더 많은 남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생활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사회의 온갖 갈등을 봉합하고 의연히 선진대열에 끼어들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