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풀이를 해서는 안된다. 이젠 우리 국민들이 정신차려야 한다.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27일 언론사 정치부장단과 오찬간담회를 자청한 자리에서 외교부가 김선일씨 피랍과 관련,진실을 숨기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지자 발끈하며 이같이 말했다. 반 장관은 "정무직인 장관으로서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 그러나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었다. 뻔뻔하다거나 지탄을 받더라도…"라고 덧붙였다. 오찬이 계속되는 동안 평소 반 장관의 신중함은 오간데 없었다. 작심한 듯 목청도 높았다.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의 '인력부족' 얘기를 할 때 반 장관의 목소리는 더욱 컸다. 그는 "아직도 가나무역 직원을 포함해 지·상사직원 25명이 철수하지 않고 있다. 이래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정부는 신이 아니다"고 항변했다. 반 장관은 "(김선일씨 피살사건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고 사고다. 지구상에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강조했다. 외교부가 나름대로 노력했는데도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외교부의 사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김선일씨 피랍사실이 알 자지라방송에 보도된 뒤 24시간 내에 김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라크 현지 납치단체와 협상을 벌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정부는 김씨 피랍 보도에도 불구,이라크 추가파병을 강행한다고 선언한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다. 현지 대사관이 교민안전을 위해 뛴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이라크를 전쟁위험지역으로 선포한 뒤 교민들의 철수를 종용해왔으나 김씨가 피살된 뒤에도 50여명의 한국인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물론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미국과 우리나라와의 처지를 맞비교할 수는 없지만 미국조차 닉 버그와 폴 마셜 존슨이 참수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도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반 장관의 얘기를 듣다보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연상된다. AP통신 기자의 전화를 받은 직원이 당초 2명에서 5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이라크 현지 공관에 확인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상사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평소에 해외교포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아무리 업무가 바쁘다고 해도 전화 한번 해볼 시간조차 없었을까. 국민들이 분노하고 언론이 외교부 직원들의 초동단계 '첩보'를 소홀히 취급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반 장관의 '사퇴'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반 장관의 직접 지시로 사건을 은폐했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제2,제3의 김선일씨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대로 된 교민안전관리 시스템을 만들자는 취지다. 외교부에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라크에 추가파병을 결정한 뒤 현지조사단을 파견했던 국방부나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해외정보 수집에 주력키로 한 국가정보원은 제 역할을 못했다. AP통신도 윤리적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AP통신 서울지국은 바그다드 지사나 뉴욕본부로부터 문제의 피랍 비디오테이프를 직접 보지도 않고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고 해명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도 외교부의 일처리에는 허점이 많았다. 언론이나 국민의 비난에 억울해 하는 것은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외교부 전 직원이 냉정하게 반성하고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할 때다. yg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