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그때 그 비구니와 농부와...' ..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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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여름이었다.
울릉도 가는 배가 뜨지 않아 묵호항에서 3일을 기다렸다.
묵호항 근처에서 머물며 매일 아침 항구에 나가 배가 출항하는 지를 물어보았다.일본 앞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해 파도가 높고 해일이 일어 배가 출항하지 못한다고 했다.
배가 출항하는 날도 파도가 높았다.
해일에 부서진 부유물들이 묵호항 방파제 안에 떠다녔다.
배가 뜨지 않아 기다렸던 손님들이 많았던지 배는 초만원이었다.묵호항에서 친구와 같이 배에 올랐다.
"와-호 와-호." "좀 조용히들 해라!"
방파제를 벗어나자 배가 놀이공원의 바이킹처럼 요동치기 시작했고 젊은 여자들이 비명을 질러대자 나이든 아주머니 한분이 소리를 쳤다.
배가 피칭(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계속하며 방파제를 벗어나 10분쯤 갔을 때였다.
"저것 좀 봐!"
동료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걸어가고 있는 젊은 처녀의 반바지를 타고 오줌줄기가 흘러내렸다. 파도에 부딪치며 솟아올랐던 배가 휙 떨어지자 무릎이 꺾여 주저앉을 뻔했던 세 처녀가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았다.
배 뒤편에 있는 화장실까지 다 가지도 못하고 처녀 하나가 참고 있던 토악질을 했다.배의 흔들림은 멈출 줄 몰랐고 속이 메스꺼웠다.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비닐봉지를 들고 배 뒤편으로 갔다.화장실이 만원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한두 명 더 있었다.
"조금만 더 가봐라,화장실은 뭔 화장실."
배 뒤 갑판에 누워 있는 청년 하나가 속이 안 좋아 다급하게 화장실 쪽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울릉도가 고향이라는 청년의 말을 듣고 그래도 멀미가 덜하다는 배 뒤 갑판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시간이 지날 수록 배멀미하는 사람들 수가 늘어났고 선원들이 다급하게 기관실과 운전실을 오르내렸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갔을까.
화장실에 들어갔던 처녀가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나오다 문을 허리에 걸고 누워버렸다.
어지럼증이 나 힘들었지만 고개를 들고 선실 안을 들여다보았다.선실 안도 통로에 사람들이 드러누워 있고 쪼그려 앉아있기는 마찬가지였다.힘이 들어 수치심마저 느낄 수도 없었던지 내 몸에 낯선 여자들이 몸을 기대왔다.
여름 짧은 옷 때문에 맨살이 닿았다.
이성의 살이었지만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급기야 배가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지정 좌석에 앉아있던 친구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원양어선을 많이 타본 친구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물에 빠지면 체온이 내려가니까 옷은 벗지 말고 신발만 벗고 구명조끼는 꼭꼭 묶어야 한다고 친구가 일러줬다.
친구는 선원증을 보여주며 브리지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선원들이 짜증을 내며 길을 가로막았다.
배가 넘어간다고 해도 구명조끼가 있는 선실 안으로 기어들어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10분쯤 표류하던 배가 시동을 걸고 다시 항해를 했다.
배멀미가 지독하게 나 작은 바윗돌이라도 하나 보이면 죽든 살든 뛰어내리고 싶었다.
"섬이 보인다!"
누군가의 외침에 힘을 내 간신히 일어나보니 멀리 흐릿하게 섬이 보였다.
그제야 친구와 가방이 생각나 선실을 들여다보았다. 3백여명 정도 되는 승객들 중 의자에 제대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통로에 눕거나 쪼그린 채 의자에 엎어져 있었다.
사람들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을 옮기며 친구를 찾아 선실 안으로 걸어들어 갈 때 인상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비구니 스님 다섯 명이 정결하게 머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거였다.
비구니 스님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던지 손에 토사물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흙을 향해 허리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출발인 농부가 기계로 모를 낸 논에서 모춤을 들고 뜬모를 하고있다.농수산물 개방 때문에 쌀농사는 별 소득도 안되는데 벼 한 폭이라도 더 심으려는 농부를 보며 그때 배를 같이 탔던 비구니 스님들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켜가는 모습이 닮아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