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03년 국민계정'에 의하면 작년 한 해의 경제성적표는 예상한 것처럼 그리 좋지 못하다. 수출과 건설투자 호조에도 불구하고 민간 소비와 설비투자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성장률이 3.1%에 머물러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수출 주력 품목인 반도체 등의 단가는 계속 하락한 반면 국제 원자재와 원유 가격 등이 증가해 교역조건은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1인당 총국민소득(GNI)이 1만2천6백46달러로 전년 대비 1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것은 국민계정 산출 방식이 63SNA(System of National Account)에서 93SNA로 바뀌었고 기준 연도의 변동과 환율 하락에 따른 것으로 실제로는 환란 전인 96년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02년 최저 수준으로 감소했던 총저축률이 상승세로 돌아섰지만 저축 성향이 증가했다기보다는 위축된 소비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올해의 경제성적표가 개선될 것인지는 지난해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던 요인들이 해결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2003년도 경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만연한 불확실성과 정책의 일관성 부재였다. 참여정부의 첫해는 시스템 운영 미숙으로 인한 리더십 부재로 요약될 수 있다. 어렵게 출발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는 데 주력하다보니 대중주의(populism)에 의한 인기 영합적 정책이 남발되었고 여론이 바뀌면 정책의 일관성도 상실됐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경제 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설득할 만한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정치적 입지를 위해 경제를 수단화하는 행태가 변화하지 않는 한 불확실성은 제거될 수 없다. 두 번째 요인은 기업의 투자의욕 상실과 침체된 소비에 따른 내수 부진이다. 지난해 최종 수요에 대한 내수의 성장기여율은 1.8%로 2002년의 57.3%에서 급락했다. 세계적인 경제 회복 추세와 중국의 높은 성장률에 힘입어 수출은 호조를 보였고 그 결과 수출의 성장기여율은 98.2%로 작년 경제는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내수가 살아나지 않는 한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어렵고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마저 훼손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반기업 정서가 팽배하고 각종 규제와 고비용 구조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해외로의 이전을 모색하고 있고 산업공동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이 신성장산업 개발을 위해 적극적인 투자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제 철폐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와 같은 노동시장 개입보다는 기업의 활발한 투자활동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소비 침체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기업의 도산과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는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다. 소비할 여력이 있는 계층들이 소비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4백만명에 가까운 신용불량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못하는 상태에서 경제 회복과 내수 진작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우선 통합금융시스템을 빠른 시일 내에 정비해 신용경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신용불량자들의 회생을 지원해야 한다. 올해도 우호적이지 못한 경제 여건이 산재해 있다. 대내적으로는 탄핵정국으로 인한 혼란과 분열,총선 전후의 극심한 불확실성이 있고 대외적으로는 테러와 이라크전쟁,급등하는 원자재 가격이라는 악재가 있다. 중국의 급성장은 기업들에 오히려 기회보다는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르고 본격적인 경제 회복 단계에 들어선 일본의 기술력은 이미 우리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경제를 지탱해준 수출 호조가 계속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많은 국가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국제통상 자유화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데도 우리 사회는 경제는 없고 정치만 있다. 이 다음에 그때가 바로 도약의 발판과 후퇴의 순간이 교차하는 모멘텀이었다고 한탄해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 모두가 경제로 힘을 모을 때다. echah@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