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혁신 시대를 열자] 제2부 : (1) '고객을 다시 정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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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의 홍보 슬로건 변천사를 보면 이 회사의 전략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종합 건축자재'->'좋은 건축자재로 신뢰받는 기업'->'건축자재 그 이상의 세계'->'벽산의 제품은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입니다'
1960년대부터 초가지붕을 대체하는 슬레이트를 생산한 이래 40년 가까이 벽산은 건축자재에만 의존해 생존해 왔다.
그 전략은 '전문화'의 하나로 잘못된 것이 없어 보였다.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백만호 건설' 사업이 진행될 때엔 벽산 영업 담당자들이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 피신을 가야 할 정도로 호시절도 경험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시작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환율이 상승하면서 원재료 값이 폭등한데다 경기 침체까지 겹쳐 공장은 거의 멈춰섰다.
영업 담당자들이 당시 거래처를 '지뢰밭'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곳곳에서 사고가 터졌다.
1998년 벽산의 새 사령탑이 된 김재우 사장은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판매 목표를 줄일 것.
당시 상황에서 판매대금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지시는 경쟁업체와 시장점유율 싸움을 중단하라는 것.
경쟁에 기반한 무리한 확장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4천여개에 달했던 거래처를 4백개로 줄이는 것이었다.
거래선 가운데 매출의 80%를 담당하는 4백개만 남기기로 했다.
이와 함께 비수익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아웃소싱도 확대했다.
벽산이 '건축자재 이상의 세계'를 찾는데 가장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고객과 구매자를 새롭게 바라봤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건축자재 업체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시공사였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에서 시장을 바라보니 건축주, 일반 소비자, 설계업체 등 지금까지 소홀히 해왔던 고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벽산은 건설업체만 만족시키면 되는 건축자재 판매회사가 아니다. 이를 뛰어넘으면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치혁신론에서 무경쟁 시장을 찾는 여섯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구매자를 다시 본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다.
"취임 초 벽산의 건축자재 제품군을 보면서 마치 난수표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합 건축자재 업체'라는 당시 슬로건을 봐도 알 수 있듯 마치 백화점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합'이란 말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똑같습니다."(김재우 사장)
이전 고객과 새로운 고객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시공사들은 현행 건축법 규정을 만족하는 값이 싼 자재를 원한다.
그러나 건축주나 일반 소비자는 다르다.
실질적으로 화재에 안전하고 음향 통제가 잘 되는 '공간'을 원한다.
그저 불에 잘 견디는 건축자재 만으로는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일례로 화재시 공간을 차단하는 벽을 설치할 때 벽에 들어가는 자재는 건축법 규정대로 고온에 3시간 이상 견딜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기 배선이나 환풍구 등을 통해 불이 다른 방으로 옮겨붙을 수 있다.
벽산은 내ㆍ외부의 지식을 총 동원해 이를 막아내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회사내 시스템애플리케이션연구소(RISA)가 지식 창출의 중추 역할을 했다.
벽산은 이를 기반으로 실제 공사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지식과 서비스, 자재를 한데 모아 패키지화했다.
예를들어 이전에는 벽마감재로 석고보드만 팔았지만 지금은 <>석고보드 본드공법 <>석고보드 외벽안쪽공법 <>석고보드 측벽단열공법 등 패키지 서비스로 판매하고 있다.
음향 관련 자재도 마찬가지다.
방음 및 음향 효과가 뛰어난 자재만 공급해서는 최종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자재를 어떻게 배치해야 최상의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 연구했고 관련 서비스와 시스템을 패키지 상품으로 판매했다.
경쟁사들은 화려한 천장 장식재를 값싸게 공급하는데 열을 올렸지만 벽산은 완벽한 음향 효과를 내는 토털 시스템을 판매했다.
결국 교회와 문화회관 등에서 새 수요가 생겼고 2002년 처음 시작한 이 사업의 매출이 올해 1백억원대로 커질 전망이다.
전략캔버스에서 잘 나타나듯 97년 이전과 비교할 때 벽산의 전략 중점은 완전히 바뀌었다.
벽산은 유통망을 줄이며 내실화시켰고 제품 종류를 단순화시켰다.
반면 <>서비스 시스템 자재를 결합한 패키지 상품 <>내화 음향 분야의 전문성 <>시장 접근성을 대폭 확대해 '주거공간 시장'이라는 무경쟁 시장을 개척했다.
이처럼 고객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린 결과 벽산은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3백여억원의 적자를 봤던 기업이 1백억원대의 순익을 내는 기업으로 변신했다.
제품 포트폴리오도 재정비했다.
지난 2000년 벽산의 단품 건축자재 판매 비율은 95%였고 패키지 상품 비율은 5%였다.
그러나 올해 단품 자재 비율은 60%, 패키지 상품은 40%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2008년에는 패키지 상품 비율이 단품 자재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패키지 상품의 수익성은 단품에 비해 훨씬 높아 곧바로 수익성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반 내화 자재의 경우 한 단위에 2천5백원 수준이지만 패키지 상품은 7천원에 달한다는게 회사측 설명이다.
"이전에 가치혁신 이론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와 유사한 가치창조경영을 추진해 왔다"는 김 사장은 "최근 한국경제신문의 가치혁신(Value Innovation) 캠페인을 보면서 벽산이 걸어왔던 길이 이와 같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김남국 기자 n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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