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UR 협상 타결 10년이 지난 오늘 가능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소비한 한국 농업의 자화상이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편견일까? 1994년 타결된 UR 협상에서는 농업부문에서의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이 추진됐다. 모든 회원국이 국내외 가격차를 관세화한 후,외국 수출업자에게 시장을 개방하고 동 관세 수준을 순차적으로 낮추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 일본 대만 등 일부 국가가 쌀시장 개방에 반발하자 특별한 조건 아래에서 관세화를 유예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수출국으로부터 일정량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기로 하고 대신 UR의 기본 원칙인 '예외없는 관세화'를 2004년까지 특별하게 유예받았으며 2004년 중에 재협상하기로 약속했다. 따라서 2004년 쌀 협상에서 우리나라는 의무적으로 관세화 또는 관세화 유예의 연장을 선택하고 2005년부터 결정사항을 적용해야 한다. 쌀 재협상은 기본적으로 다자간 무역협상 관련 사항으로 모든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에 대한 약속-의무사항이고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국회 비준을 받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과 차이가 있다. FTA는 양자간 무역협상으로 선택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쌀 재협상과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DDA 농업협상은 UR 농업협정을 대신할 새로운 무역협상의 농업부문 협상이다. 쌀 재협상과 DDA 협상 두 가지는 형식적으로 보면 별개의 협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쌀 재협상에서 관세화를 채택하는 경우 향후 쌀시장의 추가적 개방은 DDA 협상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관세화 유예를 결정하더라도 DDA 협상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쌀 수출국은 DDA 이후 예상되는 쌀 수입량을 기준으로 유예조건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단 칸쿤에서의 '개방 태풍'을 피했을지는 모르지만 전혀 달라질 것은 없다. 올해는 쌀 재협상이라는 '2호 태풍'이 불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2호 태풍을 피한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사실 10년 전 UR 협상에서 농업 개방이라는 '태풍경보'가 이미 발령됐고 이에 따라 EU(유럽연합) 일본 등 세계 각국은 시장 지향적 농정체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왔다. 1995년 이후 일본은 농민을 설득해 가며 수매가를 인하하거나 동결하면서 국내외 쌀가격 격차를 축소시켜 왔고 이미 관세화로 전환했다. 10여년 전 관세화 유예를 받았던 일부 국가 중에서도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국내외 쌀 가격차를 확대시키면서 농업 구조조정의 성과 없이 '태풍경보'에 대비하지 못하고 10년을 보낸 것이다. 쌀 소비량이 감소하고 재고량이 누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관세화 유예로 의무 수입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도 판단해봐야 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 솔직해져야 한다. '농업개방'이라는 태풍이 피할 수 없는 실체적인 대세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보다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태풍경보에 귀 기울여 지금부터라도 대비한다면 한국농업이 연착륙할 수 있겠지만,이미 태풍권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계속 무시한다면 어느 순간 경착륙할 수도 있다. 정부,농업계,전문가 집단 모두 머리를 맞대고 깊은 신뢰와 허심탄회한 대화로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농촌의 미래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이 아닌 가능의 영역에서 '농촌 종합재활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최근 정부는 한·칠레 FTA 비준을 앞두고 향후 10년간 1백19조원을 투입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울러,농지의 소유 및 이용제도를 전면 개편해 농업 구조조정을 앞당기는 논의도 시작됐다. 최근 들어 농촌 농민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바,쌀 재협상 논의는 농업 경쟁력 강화의 적극적 계기가 돼야 한다. cslee@kiep.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