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이자 회교국,반(反)서구로 유명한 나라….' 얼마 전 취재차 콸라룸푸르행 비행기에 올라 말레이시아를 생각하면서 떠올렸던 단어들이다. 마하티르 전 총리의 주도로 급성장 추세라고는 하지만 '동남아 국가가 뛰어봤자…'라는 '자만심'이 가슴 한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우물안 개구리식' 오만은 콸라룸푸르 국제공항에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콸라룸푸르 공항의 시설은 동북아 물류 허브를 지향하는 인천공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세련된 디자인의 터미널 내에서는 승객의 이동 편의를 위해 시속 50km의 전동차가 운행되고 있었으며,연간 2천5백만여명의 여객을 처리할 수 있는 초대형 공항의 현대화된 시설이 피부로 다가왔다. 전동차에서 내린 외국인들은 여권에 도장을 받으려고 입국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인들은 지하철 개찰구 같은 곳에 여권을 한 번 쓱 대고는 바로 빠져 나갔다. 마이크로칩이 부착된 여권 덕에 입국신고를 단 몇 초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난이 아닌데'라는 느낌은 공항에서 콸라룸푸르로 가는 길목의 신행정도시 푸트라자야와 첨단 IT(정보기술)신도시 사이버자야에 들어서면서 '위기감'으로 변했다. 총리공관 이슬람사원 등이 녹지 및 강과 잘 어우러진 푸트라자야는 도시 전체가 첨단 통신설비로 연결된 '스마트 도시'였다. 사이버자야에는 입주기업 10년간 세금 면제 등 이곳을 '말레이시아의 실리콘밸리'로 만들려는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도시 개발이 절반가량밖에 끝나지 않았는데도 에릭슨 후지쓰 등 다국적 기업을 비롯해 1백80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IT산업을 집중 육성,2020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비전 2020'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실현시켜 나가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모델은 한국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집어든 한국 신문엔 미래에 대한 비전은커녕 대선자금 수사,자유무역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 무산 등 온통 혼란스러운 소식뿐이었다. 과거 말레이시아의 우상이었던 한국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콸라룸푸르=이방실 사회부 기자 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