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승 SK그룹 회장이 전격 구속수감된 지난9일 밤 12시.1백여명의 취재원들은 손회장의 "한마디"를 잡기 위해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였다. 한 카메라기자는 렌즈가 깨진다며 고함을 쳤고,또다른 기자는 발목을 다쳤다며 비명을 질렀다. 손 회장이 말단 사원에서 출발해 기업의 총수가 됐고,재계의 리더격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반영한 전쟁터였다. 기자들의 관심은 사실상 한곳에 쏠려 있었다. 손 회장의 입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이나 검찰의 구속수사에 대해 "억울하다"는 일종의 폭탄발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손회장의 답변은 그러나 기자들의 기대와는 멀어보였다. 손 회장은 "지난 시절 고비를 많이 헤쳐나가다 보니 난관들이 있었고,여러분들이 우려하는 일이 생긴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손 회장이 선문답 같은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원망도,서운함도 없어보였다. 그러나 손회장은 수백가지의 의미를 넣고 싶은 것처럼,단어를 신중히 선택하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특히 고비와 난관에는 힘이 들어갔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윗분"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코드를 맞추지 않을 경우 닥치는 우환도 그가 겪은 고비나 난관은 아니었을까. 혐의만 놓고보면,손회장과 SK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가진 이들에게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조원의 비자금이나 수백억원대의 탈세서부터 7천억원대의 거액을 선물로 날렸다는 부분을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대목이다. 선물투자에서 매도없이 매수만을 지속했다는 점이나 만기까지 유지했다는 것은 아마추어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손 회장은 구치소로 향하는 차에 오르기전 눈물로 긴 말을 대신했다. 힘겹게 취재진들의 접근을 막아내던 회사 직원도 "평생 자신 생각은 해본적 없으신 분인데..."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직원은 또 "돈을 받은 사람들은 구속되면서도 떳떳하게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반면 기업인들은 고개를 떨구는 게 너무도 대조적"이라고 꼬집었다. 과연 법원이 손회장의 말처럼 "개발의 주역들이 큰 고비와 난관을 헤치지 위해"선택했던 생존방식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지 궁금해진다. 이관우 기자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