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걷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에 몸은 지쳤고 더 이상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급기야 아들은 모래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 선조들 모두가 이 고통의 길을 걸어갔노라고. 한참을 걷다보니 오아시스는 커녕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아들은 절망하며 말했다. 모두가 지쳐 쓰러져 여기 묻히지 않았느냐고. 아버지는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인근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라며 아들을 달랬다. 이처럼 희망과 절망은 생각하기에 달렸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도 이랬으면 싶다. 날짜라는게 끝없는 시간의 강물에 인간들이 매긴 부질없는 부호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새해 첫날은 늘 마음이 설렌다. 무엇인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걸기 때문일 게다. 해돋이를 보려 산이나 바다로 달려가 다시 올 내일을 기약하는 저마다의 두 손과 표정들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도 소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되새겨 보게 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지난 한해는 절망 슬픔 아쉬움으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고개숙인 가장들이 속출하고 청년실업이 급증하고 서민들은 '빚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견디는 것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시련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던 것 같다. 삶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사는 것이 고달플수록 갈구하는 마음은 더욱 커지게 마련인데 그래서 '희망'이라는 이름이 위안을 주는 모양이다.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믿음과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의지야 말로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희망은 땅위의 길과 같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길이 되듯이 절실하게 갈구하면 희망의 싹이 트는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희망을 품으면 용감하게 살 수 있음은 물론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도 비켜설 곳이 있다"는 우리 속담도 바꿔 말하면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갑신년 첫날을 맞으면서 괴롭고 미워하는 마음은 접어두고 행복 기쁨 사랑이 넘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교만하지 않고 초조하게 서두르지 않겠다는 마음도 새롭게 다진다. 이런 가운데 희망은 자라나는 것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