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발(發) 금융대란.' 신문의 한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는 특호활자를 바라보며 금융인의 한 사람으로서 착잡한 심경을 가눌길 없다. 내용 중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책임론-무분별한 카드발급과 당국의 감독미흡-에는 차라리 일말의 연민을 느낀다. 온 나라를 이토록 혼돈의 와중으로 몰아넣은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몇몇 카드사의 불찰과 감독미흡 정도라면 해당자들은 대범죄자로서의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10조원이 넘는 금융회사의 손실과 국가신인도의 하락을 감수하면서 이 기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과연 이것뿐일까? 카드사의 연체율은 통상 6∼8%선에 있었다. 카드 남발에 따른 연체율 상승도 정상적인 사회라면 아무리 감안해도 13∼14%를 넘지 않게 돼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리 카드남발이라고 하지만 카드사가 최소한의 리스크 관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나라경제가 거덜나지 않는 한 사용자들이 최소한의 양심만 가지고 있어도 넘지않을 연체율 수준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20%,30%가 넘는 연체율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 같은 연체율은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일 뿐더러,국가경제가 파산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흔히들 말하는 무분별한 카드발급의 전형인 '길거리 모집'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고,다소 과열되게 진행된 것도 2000년부터의 일이다. 그런데 안정세를 보이던 연체율이 왜 2002년 하반기부터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30%라는 말도 안되는 연체율이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비록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남의 돈을 이토록 상환의지 하나없이 무지막지하게 쓰는 풍토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거기에는 다소 복합적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언젠가부터 우리사회에 만연한 공동체의식의 붕괴,특히 법치붕괴에 따른 국민심성의 황폐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따금 카드범죄자의 인터뷰(?)에서 보듯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카드를 쓰고 연체한,소위 생계형 연체는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급기야는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근 들리는 얘기로는 카드사의 제출자료가 허위라든지,정책당국의 예측이 크게 빗나갔다는 말도 많은 모양인데,하루가 다르게 소비자들의 심성이 이토록 급격히 황폐화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봐야 옳다.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누군들 제대로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이 같은 풍토를 조성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 사람들이야말로 오늘날 카드대란의 주범이 아닌가. 누가 우리 국민들의 심성을 이리도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교육에도 책임이 있고,정치인에게도 책임이 있고,부동산 투기꾼에게도 있고,공부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방치하는 부모에게도 있다. 아니 너,나, 우리 모두에게 있는건 아닐까. 카드사들의 책임을 비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측할 길 없는 카드대란을 맞아 그래도 우리가 건질 유일한 교훈이 있다면,그것은 채권단에 정부가 압력을 행사했느냐 안했느냐 또는 그룹사의 지원이 공정거래에 저촉되느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신용사회에서 개인의 신용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준엄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이다. 제2,제3의 카드대란을 막는 유일한 길 역시 국민 도덕성의 회복이며,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를 우리 젊은 세대에게라도 확실히 가르쳐주는 일일게다. 과연 이 정부가,이 시대가 그것을 깨닫게 할 것인가. 암울한 생각이 든다. 지금도 라디오에서는 "이번 기회에 카드사들이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는 식의 원론적 해설이 판결문처럼 계속되고 있다. 마누라는 왜 또 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가? "여보, 카드대금을 3개월만 버티면 50%는 감해준다는데 사실이우?" parkji5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