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어렵게 찾아온다. 한 번 놓친 기회가 다시 찾아오기란 더욱 어렵다. 떠나는 배가 그래서 아쉽다.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와 자리양보가 있었기에 영화 '카사 블랑카'의 이별은 관객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나라 경제는 로맨스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간 전세계를 통틀어 후진국 대열 밑바닥에서 선진국 문턱을 노릴 만큼 치고 올라온 나라는 드물다. 그 희소한 성공 사례의 대표가 한국 경제다. 새로운 건국 이래 국가의 기초를 다진 초기 몇 대의 정부가 크고 작은 정치적 우행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제의 지향 목표를 바로 정하고 그 운용에 노력한 덕분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은 그 정체성에 원죄가 있었기에 경제건설로 국민의 용서를 받으려 했다. 그들의 정부 주도형 경제운용이 부작용도 컸지만 양적인 성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제규모 세계 12위권이란 것은 반세기 전 한국인에게는 잠꼬대에 불과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시장이 개도국 수출품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시대의 기회를 잘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 이후 정부들이 경제 운용에 있어서 오히려 실패하고 있다. 정통성의 오만 때문인가? 70년대 초반 이후 선진국의 국내 산업보호주의 색채는 우루과이라운드 세계무역기구(WTO) 등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교묘하게 위장된 형태로 짙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전의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정부가 글로벌 기준을 채택하면서 시장 경제의 틀을 다지는 것도 모두 자국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기회 포착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15개월간 외국 기업 유치에 있어서 한국이 아시아에서 꼴찌라는 유엔 투자 보고서와 서울시의 의뢰로 맥킨지가 맡아 조사한 '동북아 금융 중심도시로서의 서울의 잠재력' 연구 보고서는 의미심장하다. 서울이 자칫 국제 금융도시 마지막 버스를 놓칠 판이라는 얘기다. 맥킨지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금융기관 15명의 최고 경영진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이 향후 2∼3년 내 금융 중심도시로 성공할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선호도에서 홍콩 싱가포르 도쿄에는 물론 상하이와 베이징에도 밀리고 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시장 투명성이 떨어진 데다가 특히 실적이 저조한 인력의 정리해고를 가로막는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문제란다. 그래서 서울이 주변도시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법질서 확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정부 규제 개혁, 조세 인하, 법률시장 개방, 영어 사용 촉진, 도시 계획 및 교통기반 시설 개선 등을 추진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간 정부의 대응은 엉거주춤했다. 한편으로는 '동북아 경제 중심''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구호로 부르짖으면서도 막상 실행 방향과 조치에 있어서는 오리무중, 갈팡질팡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무엇 때문인가? 흔히 사람들은 발탁 인사들의 경륜의 부족만을 지적하지만, 그 보다는 '진보'와 '개혁'의 기치를 앞세워 정치를 최우선으로 선택한 때문으로 보인다. 정치 때문에 각종 이익 집단들의 단체활동에 경제논리가 실종되고 있다. 지금 나라 경제의 최대 현안은 무엇인가? 그 것은 성장엔진의 감속과 대규모 실업사태이다. 왜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을까? 그 것은 기업인들이 강성노조, 높은 임금, 규제 족쇄, 조세 중압 때문에 국내 투자를 꺼리고 있다. 정부가 편애하는 노조는 어떠한가? 노동시장에서 전체노동자의 12%만 조직화돼 있고, 나머지 88%는 중소· 영세기업의 비조직 노동자들이다. 12%의 노동시장 기득권 세력이 가로막고 있기에 청년 실업 대열이 늘고 있고 하청기업 노동조건도 악화된다. 오늘날 파업은 노동 기득권 세력의 배부른 놀이가 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노조원들조차 '파업 그만 했으면'하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지만, 노동귀족 간부들의 속셈은 다르다. 이러한 전투적 노조들과 밀월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정치판 승부를 노리고 있는 정부가 있는 한 한국이 경제 중심지가 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다. 마지막 배는 우리를 남기고 곧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