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유소 습격사건'(99년)의 한 장면. 주유소 2층 방 한구석에 액자들이 어지러이 쌓여있다. '선진조국 창조'(전두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노태우), '신한국 건설'(김영삼), '제2의 건국'(김대중) 등등…. 관객들은 액자에 담긴 역대 정권의 슬로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김상진 감독의 날카로운 시대비평을 읽어낼 수 있었다. 참여정부에서도 구호는 여전한 모양이다. 화두는 역시 '개혁'이다. 정치를, 재벌을, 시장을, 노사관계를 개혁하겠다는 것이지만 출범 4개월여가 지나도록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개혁 피로증'을 넘어 이젠 알레르기 반응까지 나타날 정도다. 참여정부는 '동북아 경제중심'에 이어 최근엔 '2만달러 선진국'을 내놓고 있다. 8년째 1만달러 덫에서 허우적대던 터라 이보다 더 피부에 와닿을 구호도 없을 듯하다. 그러나 매년 5%씩 성장해도 2만달러 달성까진 10년 이상 걸린다는 분석이고 보면 구호가 앞서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은 지난 주 몇 번씩이나 2만달러 구호를 되풀이했다. 네덜란드식 노사모델 도입 논란은 이번 주에도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획기적인 노사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지만 역시 피상적인 구호로 들린다. 오히려 국내에도 성공적인 노사관계를 이룬 기업들이 많은데 왜 밖에서 찾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최상의 노사모델이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담보해낼 튼튼한 경제시스템을 만들어 가는게 아닐까 싶다. 이번 주엔 추락하는 경제를 추스르기 위한 일정들이 잡혀 있다. 국회 재경위는 승용차 특소세 인하안을 결정(8일)하고 금융통화위원회는 추가 금리인하 여부를 논의(10일)한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 성장률 전망치를 3%대로 낮춰 잡을 예정이며 정부의 하반기 경제운용계획(14일 확정)은 주말께 윤곽이 잡힐 듯하다. 그러나 추경예산은 아직도 '국회 계류중'이고 그나마 특검범 처리와 연계돼 있다. 여당에선 2차 추경까지 거론하며 늘리자는 주장인 반면 야당에선 깎자고 맞서고 있다. 서로 내년 총선을 의식한 인상이 짙다. 노무현 대통령은 7일부터 나흘간 중국을 방문한다. 방미 때 '굴욕 외교',방일 때는 '등신 외교'로 구설수가 많았다. 이번만은 제대로 된 외교를 기대해 보고 싶다. < 경제부 차장 oh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