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노사가 95년이후 9년 연속 분규 없이 임금협상을 마무리지음으로써 노사관계에 새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핵심 사업장으로 지난 94년까지 국내 과격 노사분규를 주도했던 이 회사 노조가 '과격' 이미지를 말끔히 씻고 '실리 노조'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올해 무분규는 노조가 주5일 근무제나 비정규직 차별 철폐, 근골격계 질환 예방책 등 상급단체의 공동요구안을 배제한 채 지난 4월 기본급 인상과 상여금 고정급화, 고용안정 보장, 의료혜택 확대 등 사내문제 중심의 임금협상 요구안을 마련할 때부터 예견됐다. 노조는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의 공동 요구안이 정책적으로 해결돼야 하는 문제여서 조합원들의 정서에 맞지 않고 개별 노조의 힘으로 해결되기도 어렵다"며 사내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주5일 근무제의 경우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안보다 현대중공업 노사간의 단체협약이 훨씬 낫기 때문에 조합원들 사이에 "손해볼 수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정서가 강했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환경이 크게 달라 조합원들이 바라지 않고 있으며 근골격계 질환 예방대책도 현대중공업이 다른 회사들보다 앞서 있어 공동 요구안에 따를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가 지난달 25일의 금속연맹 총파업과 지난 2일의 민주노총 총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해마다 쟁점이 됐던 '해고자 복직' 문제도 노사가 이미 지난해에 13명의 해고자중 일부는 복직시키고 일부는 위로금을 주어 청산하기로 합의, 정리함에따라 더 이상 협상의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노조 집행부가 그 어느때보다 실리적으로 협상에 임하게 된 것은 조합원들의 정서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 회사 노조는 지난 87년 격렬한 거리투쟁, 88년 128일 파업, 89년 골리앗크레인 투쟁, 93년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 연대투쟁, 94년 63일 파업과 LNG선 투쟁등을 벌였다. 이 때마다 불법파업에 따른 대량 해고와 구속, 공권력 투입이 되풀이 되면서 결국 노사 모두가 피해자로 남게되자 과격분규나 상급단체 선봉대로서의 투쟁은 더 이상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조합원들이 깨달은 것. 특히 장기파업 때마다 '무노동 무임금'원칙에 따라 임금손실을 참아내야 했던 조합원들이 평균연령 40세를 넘기면서 무엇보다 안정적 직장과 삶의 영위를 바라게 됐고 이는 곧 노조집행부나 상급단체를 위한 정치적 파업의 거부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분규가 시작된 95년 이후에도 정치적 입지의 강화를 노린 몇몇 집행부가 한동안 대외투쟁에 나서려 했지만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번번이 무산되자 지난해 출범한 현 집행부는 아예 사내문제 중심의 실리노선을 택했다. 올해는 조합원들이 막연한 기대심리 때문에 찬반투표에서 합의안을 부결시켰던 전례도 되풀이하지 않아 '신뢰와 화합의 노사관계'가 완전히 정착되고 생산성 향상에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 회사의 협상타결은 민주노총이나 금속연맹 등 상급단체와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노조 등의 정치투쟁 명분을 약화시켜 임단협 조기타결을 촉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울산=연합뉴스) 서진발기자 sjb@yonha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