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保守)가 내세울 가치와 이념이 있는가." 참여연대 공동대표인 박원순 변호사가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워크숍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음미할 만한 점이 있다. 젊고 진보적인 계층에서 보수는 박 변호사의 표현대로 기득권과 수구,개혁저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유신과 5공(共)이라는 굴절된 시대가 남긴 후유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가 정말 내세울 가치도 이념도 없다면 한국자본주의의 앞날은 없다. 남북한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국내경제 문제를 놓고 볼 때 우리나라에 과연 진정한 보수이념적 정치인이 있기나 한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수의 간판으로 여겨지는 최병렬 한나라당 새 대표도 예외가 아니다. "노조대표를 재벌회사 이사회에 참석시켜 감사케 해야 한다" "포괄적(상속·증여·소득) 과세도 불가피하다"는 그의 주장은 노무현 대통령보다 개혁(진보)쪽으로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회사 지배구조를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로 가져가는게 옳으냐,아니면 노조를 감사위원회에 참여시키는 독일식의 이른바 이해관계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것은 이미 논쟁거리가 아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관계전문가들의 오랜 논의를 토대로 앞의 것을 회사지배구조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바 있다는 점,독일경제의 좌초로 뒤쪽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한창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민노총을 중심으로 노조 경영참여 요구가 거셀 뿐 아니라 최 대표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어느 나라보다 압축적이었던 성장과정에서 기업비리도 결코 적지않았던 까닭에 빚어지는 반작용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지만,어쨌든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친기업적이라는 등식이 항상 성립한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작년 대선과정에서 내가 만났던 기업인들 중에는 노(盧)·이(李) 누가 당선되든 초기 경제정책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반기업적 성향을 보일 것은 마찬가지라던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집권하고 시간이 가면서 기업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보수로 통칭되는 정치인들도 반기업적이게 마련이란 것이 기업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바로 그런 현상은 보수의 기치를 든 정치권이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로 이어질 수 있다. 보수의 이념적 바탕이 시장과 경쟁의 논리여야 한다는 너무도 분명한 당위를 되새긴다면, 보수가 집권하더라도 시장현실, 곧 기업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는 그렇게 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해 보수정치권의 기업현실에 대한 이해나 애정은 물론 이를 뒷받침할 이론무장은 한마디로 수준 이하다. 그 단적인 사례가 지난 대선때부터 쟁점이 돼온 포괄과세문제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감안하면 이른바 완전포괄주의는 관념상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헌법상 명시된 조세법률주의에 배치된다는 법리적 지적을 간과하더라도 기업과 세정현실을 감안하면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상속·증여의제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편인 배당의제 과세만 해도 복잡하기 짝이 없다. 감자·자기주식 취득·주식배당·무상주 지급·증자 등 보편화된 일에도 △모든 주주에게 동일한 비율이 적용됐는지 △주식배당(무상주 지급)의 경우 그 재원이 이익잉여금인지 재평가적립금인지 등등에 따라 과세소득이 될수도 있고 비과세될 수도 있다. 상속·증여의제과세를 완전포괄주의로 바꾸려면 배당의제는 물론 주가변동(평가) 등에 따른 자산평가,새 금융상품 등이 얽힌 사안에 대해 과세할 수 있는 근거조항을 만들어야 할텐데 말처럼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오죽했으면 노 대통령 스스로 난감하다고 밝혔겠는가. 바로 이런 현실적 문제를 보수 쪽에서 제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의 지적이 나온 뒤에도 '포괄과세는 불가피하다'며 총론의 범주를 겉돌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보수는 무엇보다도 현실적이어야 하고 그 방법도 개혁적이기 보다는 개량적이어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시장과 기업 현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바탕이 돼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한나라당은 과연 경제와 관련해 내세울 가치와 이념이 있는지,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