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청을 돋워 악쓰는 이도, 주먹을 치켜들어 구호를 외치는 이도 없다. 입을 앙다문 채 미천한 벌레처럼 속절없이 땅바닥을 기는 긴 행렬뿐이었다. 새만금 개펄을 있는 그대로 두자는 호소로 지난 3월28일 전북 부안 해창개펄을 떠나 세 걸음 걷고 한 차례 절하면서 잘못을 속죄하는 하심(下心)의 의식을 거듭, 국토를 거슬러온 수행단이 57일째인 23일 오전 남태령 고개를 넘어 서울에 들어왔다. 하루 8시간씩 4-5㎞를 끊는 강행군으로 부안-서울의 총 305㎞ 구간 가운데 장장284㎞를 사투로 헤쳐온 것이다. 오전 10시20분. 경기도 과천과 서울의 경계인 남태령 고개정상에 서자 2열로 길게 늘어선 행렬이 정상을 향해 꾸물꾸물 올라오고 있다. 행렬은 첫 두줄에 선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 이희운 목사, 김경일 교무가 인도하고 있다. 수경 스님은 지난 21일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극심한 두통과 구토, 근육파괴 증상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링거를 맞은 채 이날 행렬에 합류, 가파른 남태령 언덕을 넘고 있다. 언덕을 오르는 이희운 목사의 양손에는 나무 십자가가 들려 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대속(代贖)하려는 것일까. 그의 얼굴에는 가시면류관에 갇혀 십자가를 등에 이고 골고다 언덕을 기어오르는 예수의 비장함이 서려 있다. 10시35분. 고개 정상에 다다른 행렬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엉켜 벅찬 눈물을 쏟아냈다. 최연장자인 문규현 신부는 흙빛 얼굴을 가슴에 묻은 채 울음을 떠뜨린 수경스님과 이 목사, 김 교무를 뜨겁게 포옹했다. 묵언(默言)중이기에 한마디 말은 주고받지 않았지만 감동과 희열의 짧은 눈빛을 교차했다. 두줄로 길게 늘어선 400여명의 3보1배(3步1拜) 동참행렬도 잠시나마 숨을 돌리며 서울 입성에 감격해 했다. 하지만 휴식도 잠시뿐. "전북 부안 해창 개펄을 떠나 여기 서울 땅에 섰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고행과 참회, 반성의 길이었습니다"라는 녹색연합 박인영씨의 호소와 함께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는 행렬은 다시 서울의 중심부로 향해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3보1배에 동참한 환경운동연합 자원봉사자인 미국인 데이비드 몰리(24.학원강사)씨는 "3보1배는 평화롭지만 매우 강력한 항의 방법"이라며 "생태계 다양성을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장소인 새만금은 보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전북 군산-부안간 33㎞의 바다에 둑을 쌓아 여의도 면적의 140배가 되는 개펄을 토지와 담수호로 만든다는 구상. 많은 시민단체들은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며 중단을 촉구, 새만금 문제는 개발론자와 환경론자의 충돌.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해왔다. 여기에 '소외론'을 등에 업고 지역개발을 요구하는 전북지역의 목소리와 정치권의 이해득실 따지기 등이 보태지면서 이기주의에 기반한 채 해결난망인 다툼의 성격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러나 새만금 문제는 기실 '개발-생명의 조화'라는 살림살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와 관련된 철학의 문제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이런이 유로 투쟁과 비난 대신 잘못을 참회하고 속죄하는 '하심'이라는 새로운 패턴의 항의방식인 3보1배의 울림에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sh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