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yh@ksf.or.kr 새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얼마나 보기 좋은가. 자신을 불태우며 타들어가는 촛불,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나는 '완전연소'란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 70년대말이었다. '악성(樂聖)헨델'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고 진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흘 낮밤 침식을 잊은 인고끝에 출산돼 나오는 작품 '메시아'에 관한 스토리였다. 에디슨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책상위의 회중시계를 계란인 줄 알고 끓는 물에 넣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한 일화다. 어디 헨델이나 에디슨뿐이랴. 동서고금을 통해 이룩된 커다란 산업적 업적이나 과학적 성과,그리고 예술적 작품들,그 어느 것 하나 고도의 '완전연소'에 의한 소산이 아닌 것이 있을까. 무릇 물질이 연소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하나는 충분한 양의 산소요 또 하나는 발화될 수 있는 온도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잘 갖춰질 때 물질속의 탄소는 완전연소된다. 산소가 부족하거나 온도가 낮으면 불완전 연소돼 시커먼 그을음과 아울러 독성이 매우 강한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의미있는 가치창조에 생을 걸고 활활 타면서 주어진 소임에 진력하는 완전연소형,자신만의 영달이나 이권에 관심이 더 많아 세상에 해독을 끼치는 불완전연소형,또하나 아예 연소가 되지 않는,좋게 말해서 무해무익의 중성적 비연소형 등이다. 문제는 불완전연소형이 완전연소형보다 더 잘 되고 더 잘 살아가는 '그레샴의 법칙'이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그리고 어떻게 하면 '산소'와 '발화온도'가 풍부히 제공돼 연소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발전을 위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완전 연소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변화와 격랑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모든 성패는 사람에게 달렸다. 아무쪼록 뚜렷한 목표의식과 전략을 가지고 완전연소하는 '25시의 사람들'이 새로운 무대에 많이 등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가치추구엔 아예 관심없이 불완전연소를 완전연소로 위장하면서 명리만 쫓는 해바라기형 존재들이 보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각계의 모든 지도층이 스스로 완전연소돼 보통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고 우리나라에 희망의 불꽃을 번지게 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