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歲暮)의 정한(情恨)에 젖기엔 요즘 나라 안팎이 몹시 뒤숭숭하다.

'북핵'의 심상치 않은 기류가 한반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고,'촛불시위'로 상징되는 한·미관계의 불편한 기운도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미·이라크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국제유가가 요동치는 등 세계 경제에 낀 먹구름도 한층 짙어졌다.

이런 국내외 악재들이 겹치면서 증권시장이 맥을 못추고 있다.

'경제 심리지표'의 바로미터격인 종합주가지수는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20일 딱 하루 올랐을 뿐 줄곧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 주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내년 2월 새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에 본격 착수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녹록지 않은 시련이 안겨진 셈이다.

후보 시절 TV토론회에서 "내 지지도가 높았을 때 주식시장이 상승세였다.적어도 시장은 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노 당선자가 느낄 중압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요즘의 증시가 보여주듯 지금 한국 경제는 '불확실'과 '불안'의 급류 위에 올라 있다.

북핵 등의 외부 변수가 해결된다고 해서 불안이 쉽사리 해소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비와 건설 등 내수에 의존해온 국내 경제는 가계대출 과열 등 부작용을 낳은 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할 상황이다.

좁은 내수시장을 부추기는 인위적 경기부양의 한계와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난 만큼 수출과 설비투자 등을 통한 외연적 경제성장에 새로운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고비에 와 있다.

그러나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전문기관들의 조사 결과는 암담하다.

내년 1·4분기 중 기업들의 체감 수출경기(BSI)는 '최악'이라던 올 1분기보다도 더 나빠질 것으로 예측됐고,2천여개 주요 기업들의 내년 설비투자는 올해보다 2.8%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조사됐다.

'투자부진 비상'이 걸렸던 올해 증가율(3.4%)에도 못미칠 것이라는 얘기다.

기업들의 투자가 이렇게 부진해서는 노 당선자가 장담한 7%의 성장률 달성은커녕 5%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북핵 등 외우(外憂)에다 기업들의 투자의욕 부진이라는 내환(內患)이 겹쳐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노 당선자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5년간의 임기 동안 자신이 공약한 성장과 분배의 조화,기업개혁과 규제완화 등 경제분야 정책비전을 단기와 중·장기과제로 나눠 우선 '시장'을 살리고 키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대선 이후 노 당선자와 주변의 행보는 적어도 기업문제에 관한 한 시장에 또 다른 압박요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 당선자의 '측근'을 자처하는 인사들로부터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를 내년 상반기 중 도입할 것" "기업 사외이사 정원을 늘릴 것"이라는 등의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재벌 개혁'을 위해 이들 조치가 꼭 필요한 것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가뜩이나 기업 환경이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들을 벌써부터 쏟아내야 하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 26명 가운데 19명이 평균연령 40대의 진보성향 학자들로 구성된 것을 놓고도 기업과 시장의 불안은 크다.

인수위가 아직 본격 활동에 들어가지 않은 시점에서 이들의 과거 성향만을 갖고 판단하기는 이르지만,이들 대부분이 재계에 친숙하지 않은 이론파 학자들이라는 데 대한 시장의 우려를 씻는 일은 노 당선자측의 몫이다.

노 당선자는 후보 시절과 달리 그와 측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바로 현실 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다.

냉철한 안목으로 현실 경제를 파악하고,행여라도 공허한 명분론에 젖어 기업과 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