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민은행이 내놓은 신용카드 연체대책을 놓고 뒷말이 많다. 신규 카드발급 대상에서 중소기업 근로자와 자영업자를 제외하는 등 가입 기준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카드 남용으로 인한 신용불량자 문제가 워낙 심각해 취한 자구 조치라는 게 국민은행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개인 고객별 신용 리스크 분석과 관리를 통해 해결해야지,무 자르듯 선을 그어놓고 많은 사람들의 가입 기회를 막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게 비판하는 쪽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업무 편의주의'로 인해 애꿎은 선의의 피해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게 논란의 골자다. 그러나 이 논란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간과돼 있다. 신용카드 시장은 여러 기업이 참여해 완전 경쟁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국민은행이 어떤 기준으로 카드가입자를 제한한다고 해서 그 기준에 못미치는 모든 사람들이 카드 발급 기회를 아주 봉쇄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카드회사들이 이런 식의 기준을 도입하지 않는 한,특정한 발급기준 제한은 도리어 해당 은행에 시장점유율 축소라는 '비용'을 야기할 수도 있다. 대신 이 은행은 그런 비용을 감수하고 회원 가입 기준의 선을 그어놓음으로써 '우리 카드회원은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우등생들로만 구성돼 있다'는 '프리미엄 마케팅'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점시장의 경우다.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사업자가 멋대로 원칙과 기준을 정해 상품이나 서비스 이용에 족쇄를 채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건 횡포이기 때문이다. 독점시장의 전형으로 꼽히는 것이 '행정서비스 시장'이다. 대부분의 행정서비스는 공공적 성격상 정부가 독점적으로 제공한다. 그런데 그간 정부가 행정서비스라고 내놓은 것 중 일방적이고 편의적 잣대에 바탕을 둔 게 한둘이 아니다. 금융부채가 연간 소득의 2.5배를 넘는 개인에 대해서는 대출을 억제하도록 한 것도 그 중 하나다. 정부는 이 방침을 은행들에 시달하면서 개인고객이 금융빚을 갚고도 남을 예금이나 보험계좌,부동산 등 다른 자산이 있는지는 논외로 했다. 한마디로 행정편의적 단순논리의 산물이다. 그 결과로 애꿎은 피해자들이 속출하더라도 관료집단에는 '대의(大義)를 위해 감수해야 할 주변적 문제'일 뿐이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기업들이 부채비율 2백%를 넘기지 못하도록 획일적 잣대를 세우는 바람에 유동 부채가 불가피한 해운 건설 무역 등 서비스업종의 기업들에 한동안 큰 고통을 안겨줬던 것과 어찌나 닮은 꼴인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기존의 개별 법규나 시장 기능을 통해 기업의 불필요한 사업 확대를 얼마든지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고집하고 있는 것도 행정편의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획일적 잣대의 문제점을 호소하는 대기업들에 해당 부처는 '개혁의 충정을 모른다'며 되레 큰소리치고 있다. 이처럼 '개혁'으로 위장된 관료편의주의에 분노하면서도 행정서비스 시장의 독점적 특성으로 인해 생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는 게 수요자들의 고민이요, 비극이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보름 남짓 뒤면 우리의 손으로 다음번 대통령을 뽑는다. 어떤 후보가 '말로만'의 규제개혁이 아니라,관료집단의 편의적·흑백론적 행정 관행의 문제점을 제대로 뜯어고칠지를 살펴 투표권을 행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품(행정서비스)의 질이 아무리 조악하고 제멋대로이더라도 거액의 대금(세금)을 물고서 구입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들이 그나마의 '소비자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