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3 00:48
수정2006.04.03 00:51
1961년 겨울 남도의 항구도시인 목포의 한 다방.
곧 눈이라도 내릴 듯한 회색빛 하늘, 잎진 가로수를 훑고 지나가는 찬 겨울 바람.
갈탄 난로가 타오르고 있는 한 다방 안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문학청년 몇몇이 둘러앉아 문학 얘기를 나눈다.
이들중 한 명은 20세기 후반기 한국문학을 견인하는 중요한 비평가가 되고 또 두 사람은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소설가와 시인이 된다.
비평가는 김현이고 소설가는 김승옥이고 시인은 최하림이다.
1962년 여름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 최초의 한글 세대인, 아직 너무나 젊은 한 무리의 문학 지망생들이 모여 만든 '산문시대'는 그렇게 탄생한다.
김현.김승옥.최하림 등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에 4월 혁명이 흩뿌린 주체 정신과 사유 방식을 수유받은 이들 문학도는 동인지 '산문시대'의 창간호에서 당돌하고도 비장하며 패기에 찬 어조로 자신들의 시대를 선언한다.
새로운 감수성과 방법론으로 다음 시대를 열어갈 주역들이 만든 '산문시대'는 세 사람의 창립 동인에 강호무.김산초.김성일.염무웅.김치수.서정인 등이 가세하며 저희만의 영지(領地)를 일궈나간다.
이들이 일궈낸 영지에는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 '자기 세계' '개인의 자유 의지'라는 팻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김현은 죽은 뒤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당대의 한국 문학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갓 스물이던 1962년에 '자유문학'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저희 또래가 4월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민주 정신을 승계한 적자라고 굳게 믿으며 식민지 언어에 기생하지 않고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쓴 제1세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엄청난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 분석, 인문학 전분야를 아우르는 드넓은 지적 관심, 그리고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을 창작에 기생하는 장르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꼽힌다.
본명이 광남(光南)인 김현은 1942년 7월 29일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과 관련해 그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옻나무, 발목까지 빠지던 뻘의 감촉, 가도가도 끝이 없는 여름날의 황톳길, 더위,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 등이다.
그는 섬에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모를 따라 뭍으로 이사해 7월에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한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 공설시장 앞에서 '구세약국(救世藥局)'을 열어 양약 도매업을 했는데 충청 이남의 양약 공급을 장악할 만큼 사업에 크게 성공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7년 서울에 올라와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떨어지고 목포의 문태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입학한 뒤 그는 곧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뒷날 화제가 되기도 한 그의 다독 습관은 어릴 적부터 나타난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 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가지고 먹어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