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고급 과학기술 연구인력의 산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정체성 상실 위기에 빠져 있다. 고급 과학두뇌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평범한 이공계 대학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 중심 특수교육을 지향했던 과거와 달리 여느 대학과 다름없는 커리큘럼에다 정부의 지원도 줄어 KAIST의 명성은 날로 퇴색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학생들은 어렵사리 학위를 따봐야 취업조차 보장되지 않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교수들도 대학원생 확보하랴,연구과제 따내랴 전에 없던 고민에 빠져 있다. 31년 전 KAIST가 설립될 때 그 이상과 목표는 분명했다. 과학 강국이 되지 않고서는 경제적 자립,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설립된 만큼 정부의 지원과 국민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그런 기대에 걸맞게 KAIST는 개교 이래 2만4천여명의 고급 두뇌를 배출했다. 이 가운데 박사학위 취득자만 4천8백여명에 이른다. 국내 이공계 대학 교수중 15% 이상이 KAIST 출신이기도 하다. 그동안 연구개발을 위해 KAIST에 투자된 돈은 모두 6천5백26억원. KAIST는 이를 활용, 1만1천3백92건의 기술을 개발했고 1백조원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다는게 학교 관계자의 설명이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아위크'지로부터 2000년 아시아 최고의 과학기술교육기관에 선정됐으며 각종 대학평가에서도 서울대공대 포항공대를 제치고 늘 1위를 차지해왔다. 그런 KAIST가 요즘 흔들리고 있다. 정체성(Identity) 혼란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KAIST는 고급 과학두뇌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중심 특수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젠다는 퇴색됐다. 학생들과 교수, 커리큘럼면에서 다른 공과대학과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서울대공대 등과 형평성을 맞추면서 정부의 관심과 투자도 소홀해졌다. 다른 대학과는 달리 과기부 소관이어서 교육부의 눈총을 계속 받아 왔다. KAIST의 상징이던 20대 박사학위 취득자도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84년에 76%에 이르렀던 전체 박사학위 취득자중 20대 비율이 올해 초엔 39%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7~8년이 걸린다. 일부 대학원의 경우 석사학위 과정마저 정원에 미달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가시화하면서 학생들이 하향 평준화됐다는 지적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종전에 비해 학력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는게 교수들의 평가다. 교수들도 KAIST를 더이상 1순위로 꼽지 않는다. 생명공학 관련 교수의 경우 모집 정원에 크게 못미쳐 교수 확보율이 5.8%에 그친다. 서울대의 18.9%, 포항공대 8.5%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다. KAIST가 다시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미래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변호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온실 속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프런티어 정신을 가져야 한다. 지금이 바로 리모델링을 해야 할 때다. 특별취재팀 : (02)3604-265, e메일 strong-kor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