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鎭弘 < 한국예술종합학교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이번 여름 김대중 대통령의 휴가는 예년과 달리 청남대 등 외지로 이동하지 않고,이희호 여사와 함께 청와대 경내에 머물며 공식일정 없는 1주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한다. 반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오는 8월6일부터 9월2일까지 근 한달 동안 여름휴가를 갖는다. 부시 대통령은 부인 로라 부시 여사와 함께 그의 고향인 텍사스주 오스틴 북부의 크로퍼드 개인목장에 머물 예정이다. 일부에서는 최근 미국경제의 이상기류 등 사태가 녹록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너무 오래 백악관을 비우는 게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진 않지만,쉴만 하니까 쉬는 것 아닐까. 결국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의 말처럼 크로퍼드 목장이 여름휴가 기간 '서부 백악관'이라 명명되어 사실상의 백악관이 되는 셈이다. 한편 김 대통령은 1개월여 전부터 참모들이 휴가계획을 묻자,"두 아들이 감옥에 있는데…"라며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김 대통령이 휴가다운 휴가를 보낼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오늘 표결로 처리될 국회의 총리인준 여부 때문인 것 같다. 김 대통령이 휴가 중 읽을 것이라며 언론에 소개된 책을 보더라도 대통령이 최초의 여성총리로 기록될 장상 총리의 국회인준 여부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캐롤 갤러허와 수잔 골란트가 함께 쓴 '유리천장 통과하기'란 책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책은 여성이 조직에서 일정 정도 높이에 이르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게 만드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사회적으로 가로막고 있지만,도전적인 여성들은 이러한 유리천장의 틈새를 찾아내어 정상에 이를 수 있다는 성공전략과 방법을 다루고 있다.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이야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만,휴가 중에 읽을 책이라고 소개된 것마저 특정 정치사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쉽다 못해 안타깝다. 결국 국회에서 장 총리 인준동의안이 처리되면 김 대통령은 출근해 장 신임총리에게 '총리 임명장'을 정식으로 수여해 말 많던 '서리'자를 떼주어야 한다. 국정의 연속성을 생각할 때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 국회인준이 부결된다면 후임 총리서리를 다시 선임해야 하는,말 그대로 '비상체제'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서 휴가답지 않은 휴가를 보내는 바람에 고위 관료들 대부분 휴가 가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이게 생겼다.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머물고 있는데,수석보좌관이나 국무위원들이 맘 편히 휴가를 떠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달 가까운 미 대통령의 휴가 덕택에 체니 부통령은 와이오밍주에서 넉넉한 휴가를 즐기며 기업비리에 연루된 의혹 때문에 받아야 했던 마음고생을 덜 수 있게 되었고,파월 국무장관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비롯한 행정부 수뇌부와 백악관 수석참모들도 부시 대통령의 일정에 맞춰 2∼3주 예정으로 짭짤한 휴가를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맞추기라도 하듯 미국 하원도 7월29일부터 9월2일까지,상원은 8월5일부터 9월3일까지 한달여의 여름휴회에 들어간다. 국회문을 열어놓고서도 외유 나가기 바쁜 우리 국회의 모습보다 차라리 깨끗하게 문 걸어 닫고 떳떳하게 휴가를 즐길 줄 아는 그네들의 모습이 오히려 백번 나아 보인다. 이렇게 보면 국가의 CEO인 대통령이 제대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대통령 1인의 인치(人治)가 아니라,시스템이 움직이는 나라일 때 제대로 된 휴가도 가능할테니 말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인치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는 조직의 CEO는 '부재(不在)경영'과 함께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것이고,그렇지 못한 CEO는 찌는 더위에 머리마저 지끈거릴 게 틀림없을 것이다. 결국 '시스템이 살아있는 국가나 기업'과 '인치에 좌우되는 국가나 기업'은 휴가문화마저 차이가 나는 셈이다. atombit@netian.com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