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랑스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인간이다'라는 전제하에서 작품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모든 예술의 기본 전제는 인간이다. 그것은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에서 '타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어머니란 존재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라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무의식 중에 엄마에 관해 무언가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과 미움과 귀찮음과 슬픔에 관해서. 텔레비전 중독에는 여섯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왠지 불안해하는 습관적 동거형,인기 프로그램이 나오면 전화도 안 받는 막무가내형,주말만 되면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 주말중독증형, 채널을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시청하는 우연 시청형,그리고 나의 엄마가 속할,뉴스나 시사프로의 고발기사에 흥분하고 멜로드라마에 눈물을 흘리는 감정 이입형인 과다관여형. 우리 가족은 대개 오후 7시15분쯤 저녁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나면 일일연속극이 시작할 시간이다. 과장하자면 엄마는 그때부턴 리모컨을 총처럼 움켜쥔 채 세상이 무너져도 텔레비전 앞으로 간다. '텔레비전을 끄느냐 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갈등형인 내가 과다관여형인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그 시간에 엄마가 저녁 산책을 나가거나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는 어느새 배우처럼 울고 웃는다. 여기가 아닌,다른 세상으로 쑥 빨려들어간 사람 같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엄마를 이해하는 것엔 많은 난관이 따른다. 엄마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도 나이 서른이 넘고부터다. 최근에 비슷한 종류의 책들을 읽었다. 비슷하다는 건 내용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한 것이다. 미셸 캥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부모에 관해 쓴 '처절한 정원',알렉상드르 자르댕이 아버지에 관해 쓴 '쥐비알',그리고 알베르 코헨이 쓴 '내 어머니의 책'. 특히 '내 어머니의 책'은 전쟁 중에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소식을 듣게 된 아들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회한과 슬픔을 주제로 쓴 책이다. 이 세권의 책들을 거의 동시에 읽은 건 우연이었다. 나는 자주 엄마에게 시비를 건다. 반찬 투정을 하고,잠을 깨웠다고 신경질부리고,빨래를 해놓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 그건 내가 엄마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황소처럼 묵묵히 김치를 담근다. 자매들이 하나 둘 집을 떠나고 있다. 나는 혼자 남겨진 엄마를 상상한다. 그때 텔레비전 말고 엄마 곁을 지키는 건,엄마를 살게 하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책들을 덮으면서 나는 언젠가 본 웨인 왕 감독의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떠올렸다. 자신의 어머니를 떠나면서 딸은 이렇게 쓸쓸하게 독백한다. "이 세상에 엄마가 없다면 세상은 너무 무미건조하고 너무 평범하고 정의롭고 이성적일 테지"라고. 인간은 서로 상대방 없이는 견디기 힘든 존재들이다. 늙어가는 부모와 함께 밥을 먹는 일이 차츰 힘들어진다. 눈을 들어보니 어느 날 엄마는 할머니가 돼 있었다. 오늘도 엄마의 아랫배는 옷 속에 쿠션을 집어넣은 것처럼 두두룩하다. 어쩐지 그 곳엔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 차츰 좋아진다. 나는 엄마를,엄마의 삶을 이해하기로 했다. 엄마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모든 예술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인간'이라는 이름 앞에 가장 먼저 '엄마'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고 쓰라린,행복한 경험이다. 황제나비들은 태양을 나침반 삼아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한다. '빛'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리는 모두 황제나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