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시험을 치고 성적이 안돼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라면 학생이든 학부모든 불평할수가 없겠지요. 컴퓨터 실수를 보완한답시고 재배정한 것이 집에서 두시간이나 걸리는 학교에 떨어뜨려 놨는데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김태일.45.수원시 영통동) 이번 수도권고교 재배정 사태는 단순한 '헤프닝성 컴퓨터오류' 사건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학부모들과 관계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번 일은 어설픈 평준화 정책과 일선 교육관료의 무능이 합작으로 빚어낸 '한국교육행정의 총체적인 난맥상과 구조조적인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고양 성남 수원 안양권 지역 재배정사태가 서울에도 애꿎은 불똥을 튀겨 '서울시내 배치에도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항의가 쏟아지는데서 나타나듯 교육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인내의 도를 넘어선 것같다. 수도권 지역에서 원하지 않는 후순위학교에 배정된 2천1백67명중 상당수가 등교거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도 교육관료들은 근본적인 반성은 커녕 '할만큼 했다'는 자세다. 경기도교육청은 "재배정 결과 지난 8일 발표때보다 학생들의 만족도가 다소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며 "다른 시.도교육청과 비교해도 경기도교육청의 구역내 고교 진학률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기술적인 변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 어설픈 평준화가 화근 =이번 수도권 고교 재배정 사태는 평준화를 올해부터 안양 부천 고양 과천 의왕 군포 등 6개 비평준화 지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교 재배정 결과에 불만을 품고 성남교육청을 찾은 학부모 최모씨(45)는 "평준화가 '위선적인 평등주의산물'이라는 것이 드러난지 오래됐는데도 교육당국은 정책 실패를 자인하기는 커녕 오기를 부리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교육당국은 수차례 공청회를 통해 학부모 의견을 종합한 결과 80% 이상이 평준화에 찬성했다고 주장 하지만 공청회에 참가한 학부모의 대표성을 누가 보장하느냐"고 반문했다. 성남 상대원동의 김모씨(47)도 "학생 선호도가 낮아 폐교 위기에 있는 특수지 학교나 낙후 사립고교를 살리기 위해 아이들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평준화를 택한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산 신도시 주엽동의 주부 박은혜씨(43)는 "진학할 고등학교 정보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고양시 전체 고등학교 16개를 전부 나열하는 식으로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며 "컴퓨터 오류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이번 경기도 평준화정책은 행정 기술적인 면에서도 '수준이하'였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분당 A중학교 3학년 담임인 진모교사(42)는 "특히 후순위 지망학교의 경우 해당고교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이해하고 학교를 선택한 학생이 드물다"면서 "그 결과 후순위 고교에 배정된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반발이 걷잡을수 없이 크다"고 전했다. ◇ 컴퓨터가 유죄(?) =조성윤 경기도 교육감은 "이번 재배정 사태 원인은 컴퓨터 오류"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평준화의 와중에도 학생들의 선택권을 넓혀주기 위해 지망 학교를 순서대로 써넣도록 해 평준화를 실시하고 있는 어느 시.도교육청보다도 앞선 배정 방식"이라며 "앞으로도 현행 배정 방식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교육감 말대로 '컴퓨터가 유죄'라고 동조하는 사람들은 드물어 보인다. 수원에 사는 학부모 김선태씨(47)는 "재배정에 오차가 없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수원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배정돼 통학시간이 두시간을 넘는 아이들이 수없이 나왔다는 것은 근거리 배정이라는 평준화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아니냐"며 "차라리 실력본위의 고교 입시를 부활하는 것이 합리적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안양에 사는 학부모 안석호씨(46)도 "지망을 한다고 해도 무작위 추첨을 하는데 선지원 후배정이 무슨 소용이냐"며 "요즘은 능력·실력 위주 사회라고 떠들면서 정작 아이들이 가고 싶은 학교는 아파트 추첨하듯 '오늘의 운세'에 따라 배정하는 나라는 세상 천지에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며 흥분했다. ◇ 평준화 수정.보완할 시점 =이주호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평준화 정책은 당초 목적인 교육의 형평성 확보에 실패한 것은 물론 교육의 다양성과 질적 수준 향상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교육의 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정일 서울대 교수 역시 "현재 고교 평준화 제도는 학교교육 붕괴를 초래하고 가속화하는 주범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적어도 사립학교는 평준화정책 대상에서 원칙적으로 제외시켜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늘리고 사학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장하는 등 획기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방실.홍성원 기자 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