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地名)이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답답할 게다. 우리가 사는 곳도,여행할 곳도,만날 곳도 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족보를 따지는 인간관계도 혼란스러울 것이다.우리들 성(姓)씨를 말할 때 본관이 곧 지명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명은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명속에는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역사관 그리고 자연관이 용해돼 있어 인간생활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지명은 역사적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변천돼 왔다. 우리 고유지명은 신라의 삼국통일 후 한자화 되었는데,일제때 그 근원을 생각지 않고 자신들 편의에 맞게 많은 지명을 바꿔 버렸다. 예를 들면 새말이라는 지명은 신(新)자를 넣어 신촌,앞에 쇠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금(金)자를 넣어 금촌하는 식이다. 최근 포항시는 남구 대보리의 장기곶 명칭을 호미곶(虎尾串)으로 바꾸었다.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할 의도로 호랑이 모양을 본뜬 지명을 토끼 꼬리로 낮춰 개명했었다. 며칠전 한국토지공사는 전국 2백여 곳의 지명에 얽힌 유래와 의미를 모아 '국토와 지명,그 특별한 만남'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지명이 역사를 증언하고,인물의 생애를 말하고,국토개발의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老斤里)는 지명에 도끼 근(斤)자가 있어 미군의 양민학살을 예고했으며,삼성 LG 효성그룹의 창업주가 태어난 경남 의령읍에는 밥·직장을 뜻하는 솥정(鼎)이 들어 있는 정암(鼎巖)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를 외쳤던 천안시 병천(竝川)은 물이 어울리는 곳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런 이름이었기에 사방 백리 안팎의 주민들이 모여 궐기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닭띠 해에 취임하고,독재시절 되뇌이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그의 출생지인 거제시 대계(大鷄)마을과 무관치 않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우리의 지명 어느 하나도 소홀함 없이 예견적 작명을 한 조상의 지혜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