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압력과 청탁에 의한 관치금융은 사라졌다지만 그 망령은 모습을 바꾼채 여전히 남아있다. 이른바 '신(新)관치금융'으로 불리는 행태들이다. 미국테러사건으로 주식시장이 급락세를 보였던 지난달 중순께 하루가 멀다하고 열린 긴급 은행장 회의도 그 사례중 하나다. 지난달 17일 은행장들은 회의를 열고 주식시장안정을 위해 보유주식 매도를 자제한다는 자율결의를 했다. 하지만 은행장들은 하루 뒤인 18일 다시 회의를 열어야했다. 그날 증시에서 은행권이 1백30억원을 순매도 한 것으로 드러나자 금융당국에서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모인 은행장들은 전날과 똑같은 자율결의사항을 또다시 발표했다. 당시 한 은행장은 "손실률이 일정수준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매도를 하게 돼있는 프로그램매매 때문"이라며 "손실이 나도 주식을 팔지 못하면 정부가 은행의 손해를 메워줄 것이냐"며 볼멘 소리를 했다. 은행권만 아니다. 당시 투신권도 매도자제를 결의해야 했고 이를 어기는 기관투자가들은 정부당국으로부터 '시장의 배신자'라는 질책을 당해야 했다. 이처럼 직접적인 개입 대신 교묘히 시장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물론 당시 미국테러와 뒤를 이은 전쟁가능성으로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위축됐던 것도 사실이다. 정부 관계자도 "정부의 간접적인 개입은 '시장의 실패'를 막기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계에서는 이같은 상황논리를 인정하더라도 금융회사에, 시장참가자에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만큼 투명한 금융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노사정합의에 의해 정부가 금융시장에 개입할 경우 '문서'로 지시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무총리 훈령이 제정됐지만 여지껏 단 한건의 문서도 은행권은 받아본 적이 없다. 항상 관계자의 전화 한통으로 은행장 회의는 소집됐고 은행들의 내부상황은 회의에서는 무시됐다. 그리고 정부가 원하는 시장안정책이 금융회사의 자율결의라는 명목으로 발표돼 온 것이 현실이다. 채권안정기금 조성 문제가 그랬고 하이닉스나 현대건설 등 부실기업 지원문제가 그랬다. 또 이번의 주식매도 자제 결의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금융계 관계자는 "시장을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고 금융회사는 이를 위한 정책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관료들의 뿌리깊은 인식부터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