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청동기문화는 은(殷)나라 중엽인 BC 15세기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BC 10세기나 돼야 청동기가 나타난다. 철기문화도 중국에선 전국시대초인 BC 5세기면 시작된다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해도 우리는 기껏 올려잡아야 BC 4세기 부터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그렇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BC 108년,그 해에 낙랑 진번 임둔의 세 군(郡)을 두고 이듬해 현도군을 두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다. 그러나 고구려 신흥세력의 반항에 부딪쳐 진번과 임둔은 20년만에 망하고 뒤이어 현도군도 사라졌다. 평양의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지방을 점하고 있었던 낙랑군은 AD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4백21년간 한나라 식민정책 수행의 중심지 역할을 해냈다. 그곳에는 군태수 이하 관리와 상인 등 한인(漢人)들이 와 살면서 호화로운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한반도 철기문화의 유일한 센터였던 낙랑은 점령지역 뿐 아니라 남쪽 삼한지역의 새로운 사회적 발달을 앞당겨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건국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낙랑고분에 처음 눈독을 들인 것은 일본 학자들이다. 1909년 대동강 이남 낙랑토성 근처에서 벽돌무덤 2기를 발굴하고 이어서 석암리9호분 채협총 등을 발굴해 화려한 부장품들을 수습했다. 광복후 북한학자들도 많은 낙랑고분을 발굴했다. 하지만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믿는 그들은 무덤의 주인공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든 낙랑연구는 아직 개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열고 있는'낙랑특별전'(17일-9월2일)은 낙랑군의 역사적 위상과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조명하는 뜻깊은 전시회다. 중앙박물관 소장 낙랑유물,일본 소재 유물,국내 남쪽 삼한지역에서 발굴된 관련유물 등 7백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낙랑문화의 기저에는 토착세력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과 낙랑의 철기문화가 남쪽 지역에 끼친 영향을 관련 무덤형식과 유물에서 찾아보려는 전시기획자의 의도가 두드러지는 전시회다. 근래 북한출토 낙랑유물이 빠진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이 전시회가 본격적 낙랑연구의 기폭제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