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해 금지령을 내린 것은 정조 9년(1785)이다. 그러나 정조는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교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천주교도가 많은 남인의 실권자 채제공(蔡濟恭)이 요직에 앉아 천주교를 묵인했기 때문에 큰 박해는 없었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시국은 일변했다. 정계의 주도세력이 노론 벽파로 바뀌고 이들은 남인 시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천주교에 혹심한 박해를 가했다. 이것이 대박해인 신유사옥(辛酉邪獄,1801년)이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주문모 신부 등 3백여명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은 유형을 받았다. 황사영이 신유사옥의 전말과 교회의 재건책을 흰 비단에 적어 베이징의 구베아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밀서가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다. 길이 62㎝,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1백21행, 모두 1만3천3백11자를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 넣었다. 제천 배론의 옹기가마 속에서 백서를 쓴 그는 1801년 현지에서 검거돼 대역부도죄로 서울서 처형됐다. 백서의 내용중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만들거나 청의 공주를 조선국왕의 왕비로 삼아 충성의 기초로 삼으라는 등의 대책은 조정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서양의 군함과 군인을 파견해 무력으로라도 선교를 허락하게 하라는 요청도 들어있다. 조정에서는 가짜 백서를 만들어 청나라에 보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증빙으로 삼았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 심해진 것은 물론이다.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 비오 11세 교황에게 헌납돼 지금은 교황청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2백주년을 맞아 오는 9월 서울서 전시된다는 소식이다. 지난해말 발표한 천주교 2백년 역사의 참회문중 '박해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으며…'라는 구절은 주로 황사영백서를 염두에 둔 대목이다. 하지만 박해시대에 그런 잘못을 저지른 종교가 어디 천주교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