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본격적 미국 이민의 길은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면서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노동자와 그 가족 1백2명이 일본 고베에서 갤릭(Gaelic)호 편으로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12일이다. 그 가운데 16명은 송환되고 남자 48명,여자 16명,어린이 22명 등 모두 86명만이 상륙했다. 1902년 12월22일 현해환(玄海丸)을 타고 제물포항을 떠날 때는 1백21명이었는데 35명이 병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일본의 방해로 하와이 이민이 금지된 1905년 말까지 7천여명이 이런 식으로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중 여자는 10%,어린이가 약 6%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늙은 이주자들이 고국 처녀들과의 사진결혼에 얽힌 애환이 많았던 것도 여자가 남자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호놀룰루에 본부를 둔'미주한인 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이민 1백주년이 되는 2003년을 앞두고 선조들의 선구적 업적을 기리며 그동안 후손들이 미국에서 성취한 일들을 정리하는 이민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 배경에는 고국에서의 경제적 어려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은둔국을 자처하며 쇄국주의에 빠져 있던 나라의 국민들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고 처음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땅에서 한국의 국민임을 자각하게 된 이주자들은 끝내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들의 공적은 아무리 내세운다해도 과하지 않다.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 일해 69센트를 벌면 그 3분의1을 독립자금으로 냈다. 군사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것도,거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를 도운 것도 이들이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2백만 동포 가운데 이민 2,3세대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할 만큼 급속히 미국화 돼가고 있다. 그들에게 선조들의 개척정신과 고국을 위해 희생한 역사를 알리는 데는 영화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을 성 싶다. 하와이 정부도 25만달러를 돕겠다고 나섰다는데 한국정부가 어려운 처지라 해서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