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딸인 B양의 그림은 처음 낙선으로 밀렸었다. 그러나 심사위원 C씨의 목숨을 거는 듯한 투쟁으로 되잡아 입선까지는 좋았는데 어느 틈에 특선 딱지까지 붙어 버렸으니. 하기야 다른 심사위원님들도 자기 주머니 속의 이름을 입 특선시키는 데만 급급했더라니 결국은 피장파장이었던 셈" 제16회 국전 심사의 부패상을 지적한 1967년 10월 16일자 일간지 기사다. 49년 창설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은 81년 30회(50~52년 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정부 주최의 관전(관전)으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았으나 그에 따른 잡음 또한 그치지 않았다. 56년(5회)엔 대한미술협회가 라이벌 단체인 한국미술가협회쪽 심사위원이 많다며 참가를 거절해 예년보다 한달이나 늦게 열렸고,68년(17회)엔 서양화부 심사위원 남관이 "입상작 선정 투표가 사전담합에 의한 돌려먹기"라며 심사 도중 퇴장하는 사태를 빚었다. 54 63 67 71년엔 심사결과에 반발한 작가들이 낙선전을 열었다. 갈수록 문제가 커지자 76년부터 심사과정을 공개하고,80년엔 대통령상을 없애는 등 개선책이 나왔으나 결국 맥을 잇지 못하고 8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으로 변경됐다. 민전이자 신인공모전으로 성격이 달라진 미술대전의 경우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따로 두고 심사위원 연임을 금지하는 등 국전 시절의 폐해를 막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술대전으로 바뀐 뒤에도 심사위원 선정을 둘러싼 말썽과 표절 시비가 계속되더니 급기야 입상 비리와 관련,미술계 인사들이 무더기로 경찰에 입건됐다고 한다. 이런 일이 아니라도 일각에선 미술대전 무용론을 강하게 편다. 심사 결과를 믿기 어렵고 데뷔제도도 무의미한데 공모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공모전은 정규 미술교육을 못받았거나 별다른 끈이 없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등단 통로가 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결국 제도가 아니라 운영이 문제인 셈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참에 미술대전을 보다 공정하게 운영할수 있는 비책이 강구됐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