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가들은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발명을 서양문명 발전에 기여한 3대 발명으로 꼽는다. 중국인들은 이 3대 발명이 모두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나침반이나 화약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섰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지만 인쇄술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5년께 제작)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본이다. 한국이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것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영국 과학사학자 버널은 '역사 속의 과학'에 "금속활자 인쇄는 14세기말 한국에서 처음 시작됐고 15세기 중반에 유럽에 소개돼 급속하게 퍼졌다"고 썼다. 미국 역사학자 부어스틴이 '발견자들'이란 책에다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인쇄국'이라고 한 것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한국이 금속활자 발명국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장수민(張秀民)은 '중국인쇄사'에서 금속활자를 진흙.나무.도자기활자 등 여러 활자중 하나일 뿐이라고 깎아내리면서 활자인쇄는 1040년대에 송나라의 필승(畢昇)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서양보다 4백년이 앞선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한국을 얕잡아 보는 문화적 편견이다. 세계기록유산을 심사하는 유네스코 자문위원회의가 27~29일 청주에서 열린다. 청주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이 간행된 흥덕사 터가 있는 고장이다. 22개국 36건의 심사대상중 1377년 간행된 한국의 '직지심경'과 1455년 간행된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경'이 맞대결을 벌일 모양이어서 관심거리다. 버거운 상대다. 둘 다 지정되면 좋겠지만 한국의 '직지'는 단 1책(하권)만 남아 있는 데다 프랑스 국립박물관 소유여서 제작국과 소유국이 다르고 가장 오래된 기록에 우선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정 확률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꾀없이 '승정원일기'까지 후보로 올려놓아 홈그라운드 덕도 볼 수 없는 딱한 처지다. 한국이 인쇄문화의 종주국임을 세계에 알리는데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는데 안타깝다. 문화재를 해외로 유출시킨 잘못을 뉘우치면서 결과를 기다릴 밖에 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