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13일 저녁,광주의 금남로 뒷길에 자리한 한 고서점에서 "올해의 노벨평화상"수상자 발표를 지켜보았다.

고서점 안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TV앞에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수상 가능성 여부를 놓고 발표 직전까지 설전을 벌였다.

갑론을박 진행되는 설전의 내용은 꽤 흥미로웠는데 결론이 의외였다.

김 대통령의 수상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광주가 김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평소 이 고서점에 모이는 손님들이 김 대통령의 지지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내린 냉정한 결론은 적절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그날 손님들은 "노벨상 중의 노벨상인 평화상"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상은 모든 인류를 향해 보편적인 박애와 평화의 정신을 실현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바 그러기 위해선 수상자 자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정서의 일체감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의 고난에 찬 정치 역정과 민주화에 대한 노력이 수상자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국민적으로 보편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지적이었다.

대통령선거에서 40%를 조금 상회하는 지지율,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지역 감정과 이에 따른 반DJ정서를,결정권자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들을 고서점에 모인 손님들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이,올해로 1백회를 맞는"새천년 첫해의 평화상 수상자"로 김 대통령을 발표했을 때 고서점에 모인 사람들의 기쁨은 컸다.

소매깃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 대통령의 이름이 발표되는 순간 내 마음속에는 어떤 행복감과 부끄러움의 물살이 함께 술렁이고 있었다.

"행복감"은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에서 보기 좋고 살기 괜찮은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록 수상자는 김대중이라는 한국의 정치지도자 개인으로 호칭되었지만,이 상의 본질적 의미는 국제사회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온 지난 날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한 그 이력에 대한 경의라고 보아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상의 내용은 한반도 남쪽에 사는 4천3백만 사람들이 지난날 그들의 인권과 자유의 신장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또한 적대 관계였던 북한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 문을 연 그 시간들에 대한 세계인의 우정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어떤 불협화음"들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철부지 국회의원은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아예 없애기 위해 노르웨이 의회앞에서 시위를 하겠다는 발언을 해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치는 "상생"을 내세우면서도 현실은 철저히 상대방을 무시하는 쪽으로 일관하고 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속에서 따뜻한 화음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 이해집단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만 단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큰 기여를 한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다른 이기심은 몰라도 같은 민족,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형제들에 대한 이기심은 지극히 졸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형편이 어려운 상황인데 북한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강변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것이 진짜 도움"이라는 평범한 말을 해주고 싶다.

"작은 콩 하나라도 나누어 먹는다"는 말은 우리 민족이 따뜻하게 간직하고 있는 삶의 미학이다.

새천년의 가을에 우리는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큰 기쁨을 가슴에 안게 되었다.

지금까지 반목하고 질시한 상대와 이웃을 따뜻하게 껴안고,또 서로 인정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런 시간들을 만들어 나갈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