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산자락의 옹색한 개울을 바라보며 인색한 산을 올려다 본 것이 엊그제인데, 아니 좁은 개울에 온몸을 부딪치는 물살을 보며 헤픈 산을 나무란 것이 엊그제인데,어느 사이 물은 돌을 어루만지며 맑은 소리를 낸다.

그 작은 소리마저 얇은 얼음 밑으로 잦아들면 산은 조용히 죽음을 알리겠지.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에 통곡하지 않는다.

산은 그 앙상한 손으로 모든 것이 덧없어,마음이 아픈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찬란하게 푸른색으로 온몸을 감아도,붉고 노란 물감을 황홀하게 쏟아놓아도 우리는 그 산을 실컷 볼 수가 없다.

그저 용케 때를 안 놓치고 하던 일을 팽개치고 잠깐 달려가 보아도 정말 본 게 아니다.

앙상하게 뼈를 드러낸 후에야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순간적이었고 우리가 그 많은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는지 깨닫는다.

산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기억의 눈으로 지난 아름다움을 본다.

언제나 없어진 후에야 본다.

아침 출근 시간에 차를 타고 갈 때처럼 빨간색이 싫을 때가 없다.

그런데도 왜 그리 빨간색은 내 앞을 가로막는지 도시 한 복판에 울긋불긋하게 핀 꽃들까지 공연히 밉다.

푸른색이 더 좋아,좋단 말이야.

아파트 사이에 보이는 나무나 풀이나 풀밭이 푸른 신호등만큼이나 좋다.

도시에서 푸른 신호등에 갈증을 느끼는 사이 산은 푸른 옷을 저 혼자 실컷 입었다가 벗어 던진다.

그리고는 앙상한 가지 앞에서 후회하는 우리에게 다음 봄과 여름과 가을을 약속한다.

자연은 한번도 속인 적이 없기에 우리는 서러움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내년이면 실컷 볼거야.

푸른색으로 오랫동안 뒤덮였다가 아주 잠깐 황홀하게 붉은 빛을 던지는 그 완벽한 아름다움을.

그러나 산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 몸에서 낳은 자식이 언제 어미 말을 듣던가.

세상에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는데.

산에서 태어나서 산으로 돌아가는 우리인데 왜 빨간 신호등은 그리 많은지.

싫다고 하면서도 왜 빨간색을 떠나지 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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