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뒤 제일.서울은행을 비롯 무수한 매각협상을 벌였지만 제대로 판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국부유출 논란, 헐값시비, 졸속 매각 등의 비난을 받던 매각협상들이 정작 계약단계에서 속속 깨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제협상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시리즈로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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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내일 협상에 굴복하더라도 오늘은 포커 페이스로 협상테이블에 앉는 것이 국제 딜(거래)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인수의사도 확인하기 전에 먼저 시한부터 정해 놓고 딜에 임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뿐일 것입니다"

국내 기업의 해외매각을 몇 차례 성사시킨 컨설팅 전문회사 관계자는 정부와 산업은행이 대우차를 한달 내(10월20일까지)에 팔겠다는 데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시한을 보름 정도 남긴 지금도 GM과 현대 컨소시엄이 ''산다, 안산다''로 설왕설래하고 쪼개 팔 수도 있고 묶어 팔 수도 있다는 얘기로 혼란만 거듭할 뿐이다.

이런 조급증은 이용근 전 금감위원장이 국제관례에 어긋나게 포드의 제시가격(7조7천억원)을 공개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금감위 관계자는 "세계 굴지의 자동차메이커가 높은 가격을 써낸 데 감격해 촌스럽게 대응한 감이 없지 않다"고 회고했다.

포드는 대우차 인수협상 및 실사팀으로 2백여명을 투입했다.

이들은 시간당 5백달러를 받는 특급 변호사와 회계사 엔지니어 등으로 구성됐다.

이 과정에서 포드는 무려 2천만달러를 쓴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살 물건''이 아니란 생각이 들자 과감히 손을 떼더라"며 정부 관계자들은 놀라워 했다.

한보철강의 계약파기엔 거꾸로 공무원들의 늑장행정이 한몫했다.

느긋해야 할 매각협상은 서둘렀고 서둘러야 할 뒤처리엔 느긋했던 셈이다.

네이버스측이 계약 선행조건으로 제시한 조세채권 현가할인이나 당진부두 전용사용권 등이 막바지 협상에 들어간 9월 중순까지도 미결상태였다.

자산관리공사가 제일은행으로부터 한보철강을 넘겨받은 뒤 백방으로 뛰었지만 관할 관청들은 ''나몰라라''로 일관했다.

급기야 청와대가 중재에 나서 9월 말에야 해결했지만 이미 판이 깨진 것이다.

한보 채권단 관계자는 "정부가 네이버스를 상대로 소송을 걸겠다고 하지만 거꾸로 그쪽에서 계약조건 불이행을 들어 소송을 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매각협상 실패의 이면에는 △조급해 하는 정부 △바이어에 대한 정보 부재 △국제협상.관행에의 미숙함 등 총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윤창현 명지대 교수는 "아무리 팔기 어렵더라도 우량한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기다리고 바이어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해 옥석을 가려내는 자세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국제전문가가 달려들어도 파는 물건이 좋지 않을 때 제대로 된 협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개발연구원 임영재 박사도 "협상력 부재도 문제지만 부실기업을 매각할 때는 아무래도 사는 쪽에서 칼자루를 쥐게 돼 현실적인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만도기계의 매각과정에서 로스차일드가 브리지론으로 10억달러를 들여오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고작 1천만달러를 들고 왔다.

정부와 채권단은 로스차일드가 제시한 호(好)조건에 눈이 어두워 벌처펀드 성격인 바이어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대한생명 국제입찰에서도 정부는 파나콤이란 정체불명의 인수희망자에게 망신을 당했다.

미국 회계사를 지낸 금감원 관계자는 "세계 최고라는 하버드 예일대 등을 나온 변호사들이 만든 2천쪽짜리 계약서를 다 읽어 보지 않고 우리말로 된 10쪽 안팎의 계약요약서만 보고 서명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10쪽만 봤으므로 나머지 1천9백90쪽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모를 수 밖에 없고 협상이 깨졌을때 사후 대응도 못한다는 얘기다.

협상결렬에 대한 반성도 미흡하다.

HSBC(홍콩상하이은행)이 서울은행 인수를 포기한 것은 실사해 보니 생각보다 더 나빴다고 본 탓이었다.

포드가 왜 대우차 인수를 포기했는지에 대해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포드의 타이어 리콜, 엔진 결함 등 포드 탓으로 돌렸다.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한국정부가 지피(知彼)도, 지기(知己)도 제대로 안된 채 국제딜에 서슴없이 나서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