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수립초부터 군무부라는 군사관장부서가 있었다.

그러나 임정 초·중기 군무부의 역할은 만주지역 독립군부대들의 활약과 비교한다면 유명무실했다.

독립군부대들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단지 대일 항쟁방안을 제시하고 부분적 연계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무관학교에 인재를 위탁교육시키는 데 그쳤다.

임정 정규군대인 광복군(光復軍)의 설립이 계획된 것은 1936년 11월의 일이다.

하지만 다음해 중·일전쟁이 일어나 임정이 항저우(杭州),창사(長沙),류저우(柳州)등을 거쳐 충칭(重慶)에 자리잡은 뒤에야 창군작업에 착수한다.

임정이 광복군 창군식을 가진 것은 40년 9월 17일 아침 6시 가릉빈관(嘉陵賓館)이란 호텔에서였다.

창군식에는 김구 등 국무위원을 비롯한 귀빈 2백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당시 임정이 국내외 동포에게 이청천(李靑天,본명 池大亨)을 총사령,이범석(李範奭)을 참모장으로 한 광복군의 창설을 알리는 포고문에는 광복군이 구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독립단체임을 천명하고 있다.

광복군은 임정이 41년 12월10일 대일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연합군과 함께 태평양전쟁에 참가한다.

일본군과의 전투 외에도 포로 심문,선무공작,암호문해독 등 다양한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일부는 버마·인도 전선에까지 파견돼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했다.

일제의 항복으로 9월로 예정됐던 국내진공이 물거품이 된것은 김구뿐만 아니라 광복군 모두의 한으로 남은채 46년 해체되고 만다.

광복군 창군 60돌을 맞은 어제 충칭에서는 광복군동지회원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정청사 전시관 개관식을 가졌다는 소식이다.

또 15일 서울서 열린 기념학술대회에서는 통일시대에 대비해 ''국군의 날''을 9월17일로 바꿔야 한다는,학자들의 성급한 주장도 나왔다.

정통성이란 국민이 부단히 만들고 지켜가야 하는 과정이며 절차이지 고정된 사실이 아니다.

최근들어 갑자기 무성해진 통일논의가 불러올 혼란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