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당 의원과 6공때 보사부장관 경제수석을 지낸 ''옛 사람''의 기용설이 왜 나오나"

경제부총리 등 요직 중용설이 나도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가까이에서 호흡해 보지 않은 다수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그와 함께 일했던 전현직 공무원들은 대부분 그에 대해 "개혁성향이 강하고 통이 큰 남자"라는 인물평에 주저하지 않는다.

청와대에서 그를 보좌했던 K청장은 "청와대 수석회의 때면 보통 다른 수석들은 밑에서 써준 것을 들고 가는데 그는 본인 노트만 달랑 들고 들어가 보고했다"고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중하위직에서 한단계씩 올라가면서 그만큼 성장하는 정통 관료들과 달리 유학(독일 뮌스터대학)-대학교수(서강대 경제학과)-국회의원-장관(과거 보사부)-청와대 수석의 경력을 거치면서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익숙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90년초 경제수석으로 부임했을 때는 청와대에 있던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이란 조직을 없애버렸다.

"산업이란 것이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인데 수도권 집중 등을 억지로 막는다고 효과를 낼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대신 이석채 박운서씨 등 1급 비서관들과 협의, 사회간접자본(SOC)투자기획단을 신설했다.

그러면서도 경제력 집중에 따른 부작용에는 큰 관심을 보여 6공 후반기에 재벌개혁을 시도했다.

토지 공개념제도를 반영해 재벌들의 과다한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는 90년 5.8조치가 그의 작품이다.

독일에서 공부한데다 이같은 경제관으로 인해 생산적 복지 등 DJ노믹스와 접점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첫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에 대한 DJ의 남다른 존경이 그 손자인 김 수석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 면도 있다고 주위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임기말 동화은행 뇌물수수건으로 구속된 경험이 큰 흠집으로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역로비에 걸린 낙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업들은 그의 스타일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