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하나의 풍경으로 이해한다면,그 풍경과 만나는 많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음미하는 것,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며 즐기는 것,높이 뜬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 것 등이 그 것이다.

이 중 우리 시대의 삶의 방식은 점점 후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빠른 속도는 망각을 위해 봉사한다.

초고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창 밖의 풍경을 오히려 하얗게 지워버린다.

이륙할 때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조그마한 창에 비치는 것은 뿌연 구름뿐이다.

창 밖의 풍경과 단절된 승객들은 잠을 자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대는 속도를 얻은 대신 풍경을 잃어버렸다.

삶의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고 마음에 스미는 삶의 풍경은 희미하거나 부재중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7,8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학교 앞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는 학교 앞의 거리,이름을 줄줄 외울 수 있는 식당과 커피숍,빵집과 복사가게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슬픈 ''발견''이었다.

풍경이 교체되면서 낯설어진 거리는 새로운 시대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10년도 걸리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 때,내가 누볐던 거리의 마지막 장소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클래식의 선율이 잔잔히 흐르던 ''심포니''라는 커피숍이었다.

2층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아름다웠던 그 집은 독특한 커피 기구 때문에도 무척 인기가 있었다.

실험실에서 쓸 법한 ''사이폰''이라는 추출기에 물을 넣고 알코올 램프로 가열해 끓여주는 커피의 맛은,그 신기한 조리 과정에 이미 넋을 빼앗긴 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낯선 세계의 경험처럼 향기롭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감각과 영상의 시대''인 90년대가 되면서 심포니는 점점 빛을 잃었다.

나는 친구들과 젊은 날의 유적을 지키는 심정으로 열심히 드나들었지만 그 퇴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 또한 어떤 장소를 필요로 한다.

이런 연유로 삶의 풍경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풍경의 소멸은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육체와 정신,영혼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은 이상한 꿈을 갖고 있다.

그 꿈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풍경을 늙어서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 꿈은 질문이 된다.

삶과 작별해야 할 즈음,살아오면서 보았던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을 다시 볼 수 있게 될까.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의 풍경들에 마음이 불안해질 때,나는 사진으로나마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중심가에 있다는 4백년 된 꽃집,일본에 가면 흔하다는 2,3백년 된 우동집 앞에서 왠지 아늑한 마음이 되어 멈춰 서곤 하는 것이다.

''바꿔''의 열풍이 온 나라를 흔들기도 했지만,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키는''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그러나 현대 문명은 지켜야 할 것을 바꾸고 파괴함으로써 큰 불행을 초래했다.

포크레인에 의해 초토화된 국토는 변화에 대한 이 땅의 ''광기''를 대변한다.

한 예로,내린천 상류의 미산은 1년 전엔 제법 오지의 풍모를 갖춘 곳이었는데 올해는 2차선 도로공사가 진행중이다.

이제 폐허가 된 미산 계곡은 파괴된 자연의 비극적인 현장으로 존재할 뿐이다.

삶의 풍경은 정신의 풍요 및 인간의 행복과 직결된다.

삶의 풍경에 대해 우리는 그 풍경의 밖에 있는 관찰자가 아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 풍경의 일부였다.

행복한 삶이란,나아가 위대한 문명이란 아름다운 삶의 풍경을 보존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루소는 행복이란 몇 개의 황홀한 순간이 아닌,단순하고 항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 ''단순하고 항구적인 것'',행복은 이미 우리가 잃어버리기 직전의 삶의 풍경 속에 존재하고 있다.

많이,너무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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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평론집 ''환각의 칼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