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와 육당 최남선은 절친한 친구였다.

일제말 육당이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자 위당은 상복을 차려입고 육당의 집을 찾아가 "내 친구 육당이 죽었다"고 통곡했다.

정부수립후 육당이 반민특위에 걸리자 위당은 증인으로 나서서 일단 친구 육당을 변호했다.

하지만 그가 석방된 후에는 그와 끝내 상종하지 않았다.

전통적 의리론을 지킨 위당의 꼬장꼬장한 남산골 딸각바리선비기질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화다.

정부수립 직후 뜻하지 않았던 감찰위원장을 맡았을때 김법린을 어디 갈 데가 있다고 끌고 나가 가족만 참석한 둘째 아들 결혼식 주례를 세운 일은 위당의 청렴한 성품을 되짚어 보게 한다.

그는 또 결코 불의를 보고는 그냥 넘기지 못했다.

관용차를 타고 선거운동을 벌이는 임영신을 갖가지 압력을 물리치고 법에 걸어넣은 일이 대표적 예다.

위당은 한문학자 사학자 국문학자 독립지사 교육자로서 일생을 국학진흥에 불사른 인물이다.

조선왕조때 10명의 재상이 나온 남산골 명문가에서 1893년 태어난 그는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운뒤 13세때부터 강화의 이건방 문하에서 공부했다.

공리공론에 치우친 성리학공부가 아니라 실질을 숭상하는 양명학의 학품을 그는 이곳에서 체득한다.

위당은 일제 강점 뒤 한때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모친상을 당해 귀국한 그는 1922년 연희전문과 첫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거기서 20년 가까이 백락준 최현배 등과 함께 국학연구에
몰두했다.

월세 전셋집을 전전하던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늘 학생들이 북적거렸다.

백낙준 민영규 등이 편찬한 ''담원 정인보전집''(6권)에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국학''이니 ''실학''이니 하는 용어를 만들어 쓴 사람도 위당이다.

광복직후 설립된 국학대학도 그가 국학진흥을 위해 세운 것이나 다름 없다.

다시 남산골로 들어가 국학연구에 골몰하던 그는 6.25때 납북돼 그해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7월은 "정인보의 달"이다.

난세에 지사가 나는 법이요, 탁세에 지조가 빛나는 법이라고 하지만 요즘같은 난세나 탁세에 눈을 씻고 찾아도 지사는 보이지 않는다.

위당을 되새겨 보는 뜻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