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양가 부모님께서 이구동성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보증서지 말라"
는 것이었다.

친정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만약 친아버지인 내가 해달라고 해도 절대
해주면 안되는 것이 바로 보증"이라고 말씀하셔서 우리는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정작 보증 서 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어머니가 숱하게 마음 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마음 좋고 의리있는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한 며칠후부터 보증 부탁을 듣게 되었다.

자동차를 구입한다거나 급한 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에서
부터 자동판매기를 사서 부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보증을 서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까지 다양했다.

우리는 이미 부모님의 충고를 들은 후였으므로 정중히 사양했다.

그 일 때문에 가까웠던 몇몇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우리는 돈 대신 친구들을 잃었다.

우리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친구들이 서운했다.

그 일 때문에 우리는 결혼 6년동안 다른 사람에게 보증을 부탁할 일이
생기는 것을 피해 왔다.

이런저런 일로 사람들을 새롭게 사귀게 되었다.

K도 그렇게 알게 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몇 번의 전화 통화 끝에 K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K는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젊은
아가씨답게 쾌활하고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혼자 독학해서 AFKN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영어 실력도 길러 놓았다고 했다.

나는 K가 좀더 좋은 직장을 구해 열심히 일하기를 바랐다.

나도 최선을 다해 직장을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K가 돌아간 후 남편이 말했다.

"말이 앞선 거 아냐? K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잖아" 나는 남편에게 발끈
화를 냈다.

"왜 그렇게 부모님들 말을 흉내내는 거야? 이건 돈에 대한 보증이 아니야.
사람에 대한 보증이라구"

내가 생각했던 직장에는 이미 K와 똑같은 전공자가 일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K의 나이가 너무 많아 곤란하다고 했다.

"K는 정말 믿을만한 친구야. 내가 보증할 수 있다구"

아무리 얘기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보증을 서려고 하는데 내 보증은 효과가 없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