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벤처천국, 실리콘밸리 ]

실리콘밸리의 가장 북쪽에 있는 팰러앨토.

스탠퍼드대학과 마주보고 있는 조용한 주택가 매디슨 애비뉴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허름한 차고 앞에 붙은 작은 표지가 눈에 띈다.

"실리콘밸리의 탄생지(Birth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팻말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한 이곳에서 지난 1938년 세계 최초의
주파수 발진기가 만들어졌다.

당시 20대 청년으로 스탠퍼드 공대 전기공학도였던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이 차고에서 단돈 5백38달러로 세운 휴렛팩커드(HP)는 오늘날 세계
최대의 계측기 업체이자 세계 PC업계의 "빅 3"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섰다.

1998년 매출액은 4백71억달러.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의 역사는 바로 이 휴렛팩커드로 시작된다.

벤처 기업, 특히 정보통신 관련 기업들은 미국 경제 최고의 버팀목으로
꼽힌다.

1997년 기준으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33%가 이들 벤처 기업에서 나왔다.

벤처 기업은 미국의 젊은 기업가들에게 현대판 "엘도라도(황금향)"로
불린다.

일단 기틀만 잡으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벤처 기업으로 성공할 확률은 1%에도 못미친다.

실리콘 밸리를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창업되는 벤처 기업은 연간 60여만개.

그러나 이중 앤젤 펀드 등으로 불리는 벤처 캐피털 회사들의 투자 대상으로
"낙점" 받는 기업은 2천여개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5년을 버티지 못하고 간판을 내린다.

벤처 캐피털의 지원을 받은 2천여개 기업들중에서 나스닥 상장이라는 최종
관문을 통과하는 회사는 1백~2백개에 불과하다.

최종 생존확률이 0.03%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벤처 기업을 차린 미국의 젊은이들이 창업 이후 최소한 6개월 동안은
"충혈된 눈과 차가운 피자, 수면 부족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는 이런 비정함만 있는게 아니다.

이 곳의 벤처투자가로 유명한 가와사키 가이개리지닷컴(garage.com) 사장이
말하는 "실리콘밸리의 법칙"에는 실패에 너그러운 문화적 토양이 바탕에
깔려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창업에 실패한 사람이나 IPO(주식공개)로 성공한 사람
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벤처기업가가 펀드를 받아 사업을 확장하다가
망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펀드를 낸 사람은 자신의 책임으로 돈을 투자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따질 수도 없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아이디어로 다시 시작한다. 사업은 망해도 벤처기업가는 망하지 않는게
실리콘밸리의 법칙이다. 이곳의 투자자들은 경험없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한번 실패한 사람을 선호한다"

벤처자본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실패를 겪고도 이곳 벤처자본의 연평균 수익률은 30~40%대를 유지
한다.

은행 이자율의 10배를 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투자자들이 벤처자본에 돈을 대려고 줄을 선다.

벤처캐피털이 "10개 기업이 망해도 하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공격적 투자가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와사키 사장은 "6천개의 기업에 투자해 6개만 제대로 키워 내면 투자에
성공한 셈"이라고까지 말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요즘 "부티크 숍" 바람이 불고 있다.

부티크 숍은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창업 벤처기업을 잘 치장해 줘 돈을
벌게 해주는 회사들을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고객사의 자리를 알아봐주는 회사부터 사업운영 컨설팅을 해주는
곳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경영을 대행해 주고 자본을 투자하는 회사도 있다.

벤처기업에 필요한 고가의 장비를 임대해 주는 리스업도 호황이다.

변호사 회계사 등도 기업지원 인력도 풍부하다.

실리콘밸리에 터를 잡고 성공의 꿈을 펼치려는 벤처기업들에는 최강의
외곽지원 조직인 셈이다.

가능성만 믿고 기꺼이 돈을 대는 벤처캐피털도 이곳의 벤처기업에는 큰
힘이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 관계자는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 9개월동안 이 지역에
투자된 자금이 무려 33억2천4백만달러로 추산했다.

이 기간동안 미국에 투자된 벤처캐피털의 36.9%에 달하는 막대한 액수다.

"그럼에도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에는 여전히 투자할만한 기업을 찾는게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스탠퍼드대학 캐서린 쿠 OTL 소장은 말한다.

이같은 자본과 지원조직 등이 이루는 인프라들이 실리콘밸리를 "벤처천국"
으로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 실리콘밸리=이학영.김태완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