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시간여행 (하)] 유럽경제 통합 .. '유럽통합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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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후 유럽통합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대략 4사람 정도.
우선 "유럽통합의 시조"라고 불리는 프랑스 외교관 장 모네가 있다.
그는 유럽식 연방국가의 창설을 강조하며 "국가들간의 연합이 아니라
유럽인들간의 결속을 실현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를 위해 오늘날 EU의 모태가 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계획을
세웠다.
우선 유럽의 석탄및 철강자원을 공동관리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참여하는
전후 유럽최초의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가 명예 유럽시민으로 추대되기 전까지
유일한 명예 유럽시민이었다.
모네의 안을 받아들여 ECSC를 만든 사람이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망이었다.
이후 초대 유럽의회 의장을 지내며 "유럽연합(EU)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슈망은 51년 ECSC와 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모네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50년에 "슈망선언"을 발표했고 이듬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참여하는 ECSC를 발족시켰다.
슈망의 정책은 ECSC에서 EEC, 유럽공동체(EC)로 이어져 결국 EU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최초로 단일통화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은 룩셈부르크 총리였던 피에르
베르너였다.
그가 70년에 제안한 3단계 화폐통합안은 이후 마스트리히트조약에 그대로
반영된다.
콜 전 독일총리는 단일통화의 산파였다.
그는 재임 16년간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을 똑같은 비중을 두고 추진했다.
그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유로화 출범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완수"라는 그의 꿈은 지난해 9월 총선패배로 끝났다.
< 박수진 기자 parksj@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1일자 ).
우선 "유럽통합의 시조"라고 불리는 프랑스 외교관 장 모네가 있다.
그는 유럽식 연방국가의 창설을 강조하며 "국가들간의 연합이 아니라
유럽인들간의 결속을 실현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를 위해 오늘날 EU의 모태가 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계획을
세웠다.
우선 유럽의 석탄및 철강자원을 공동관리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참여하는
전후 유럽최초의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가 명예 유럽시민으로 추대되기 전까지
유일한 명예 유럽시민이었다.
모네의 안을 받아들여 ECSC를 만든 사람이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망이었다.
이후 초대 유럽의회 의장을 지내며 "유럽연합(EU)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슈망은 51년 ECSC와 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모네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50년에 "슈망선언"을 발표했고 이듬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참여하는 ECSC를 발족시켰다.
슈망의 정책은 ECSC에서 EEC, 유럽공동체(EC)로 이어져 결국 EU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최초로 단일통화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은 룩셈부르크 총리였던 피에르
베르너였다.
그가 70년에 제안한 3단계 화폐통합안은 이후 마스트리히트조약에 그대로
반영된다.
콜 전 독일총리는 단일통화의 산파였다.
그는 재임 16년간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을 똑같은 비중을 두고 추진했다.
그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유로화 출범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완수"라는 그의 꿈은 지난해 9월 총선패배로 끝났다.
< 박수진 기자 parksj@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