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순 < 서울대 교수 / 국어국문학 >


시를 절대적인 것에 대한 동경의 첫머리에 놓고 시를 꿈꾸고 제작하는 것을
인간적인 삶 가운데서 가장 큰 가치의 하나로 여겼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거의
한 세기를 흘러왔다.

그 한 세기를 가로질러 오면서 문학의 지위는 그 때에 비해 형편없이 추락
했다.

지금 우리는 문학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논의들이 제기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새 밀레니엄 시대의 시와 문학의 운명을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 문인들은
스스로부터가 문학의 시시껄렁함을 말하는 대열의 맨 선두에 서 있는 것이다.

2000년대에도 여전히 시가 옛날처럼 시인들에게 절대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회의적이다.

시를 위해 순교한다든가 시인이 되기 위해 몇 날 밤을 새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청춘 시절을 허비하면서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낙방을 거듭하던
시대는 아마도 이제 종언을 고할 것이다.

세계의 변화에 정신의 변화를 조응시키거나 남보다 먼저 이 세계를 내다
보고자 하면서 인간 삶의 진정성과 당위성에 관해 논할 수 있었던 시인의
운명은 이제 종말을 고한 듯이 보인다.

이 황홀하고 감각적인 속도의 시대에 누가 시를 읽고 시인의 언어를 마음의
움직임에 맞춰 읊조려보겠는가.

인간의 정신상의 변화와 기술 발전의 속도가 거의 비슷하거나 기술이 조금
빠른 속도로 앞서 가던 그런 아날로그화한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소리를
우리는 지금 곳곳에서 듣고 있다.

기술과 인간의 영혼이 그래도 보조를 맞추며 병행할 수 있어서 인간적인
리듬이 살아있던 "느릿한" 세계는 끝났다.

2000년대의 세계는 너무나 놀랍고 새롭게 충격적인 속도로 디지털화하고
있는 것이다.

"빠름"에 대해 진단하면서 그것의 몰인간성과 비상식적인 가치에 대해
경고하고 훈계하는 문학의 이런 수동적이고 견인적인 기능은 이제 거의
소멸되고 있다.

시는 이제 그 새로운 속도의 패러다임을 예측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이버 세계 속에서 인간은 시간의 소멸이라는 새로운 존재 조건과 마주치게
된다.

그 속에서 시인은 더 이상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에 관한
심각한 질문을 떠올릴 필요가 없어졌다.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육체는 곧 인간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육체에 의해
대체된다.

인간 복제 시대의 기술력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속도로 우리를 관통해 나가
버린다.

병들었던 한 시인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육체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부수어진
육체의 환영을 붙잡고 절규하며 눈물어린 유희를 하곤 했던, 한때는 가장
전위적인 것이었던 식민지 시대 이상의 테마들은 이제 얼마나 고루한 것이
될 것인가!

시인들의 미래는 이렇듯 불안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이 시시껄렁한 시로부터 무엇인지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시의 영토에 남아있는 협소하고 탄성이 빠진 세계가 껴안고 있는
그 나름의 진실에 있다.

시인들의 미래가 불안한 것만은 아니다.

사이버적인 세계에서 시인들이 사는 현실 공간은 훨씬 좁아들겠지만
시인들의 상상의 폭은 그 반대로 지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빠른 속도와 초현대적인 세계의 충격들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고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단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실재의 세계 속에서
현존케 했던 원시적인 인식 단계와 내밀하게 조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이고 범신론적인 신화적 세계로 복귀
하게 되는 것이다.

시의 새로운 가능성은 이처럼 기술의 미래가 원시적인 신화를 되돌려주면서
새롭게 펼쳐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에서 일반화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 우리 시인들에게서 이 타락한 시대에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식은 아주
협소한 변경의 지역에서 제 자신의 목소리로 낮은 노래를 부르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화한 세계 속에서 시인은 가장 느린 걸음을 걷는 자 혹은 그 걸음이
너무 느려 속도를 계량화조차 할 수 없는 탈 현대성의 존재가 돼버렸다.

현대인의 소외를 말하고 절규하며 그 병적 징후들을 판독해내던 능력조차
소멸하는 시대의 자잘한 언어를 시인들은 품어 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희소성과 특이성이 시인을 시인답게 할 것이며 시 장르의 이러한
변경성이 시의 존재를 공고하게 해줄 것이다.

< shink777@nownuri.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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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석.박사
<>평론집:분단문학비평, 해방공간의 문학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