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오늘 따라 아들애가 늦도록 기다리고 있다.

현관문을 열기가 바쁘게 뛰어나온 아이는 "포켓 몬스터 수첩을 사달라"며
매달린다.

밤도 늦었고 그런 걸 파는 가게도 문을 닫았다고 아무리 달래도 "다른
애들은 다 가졌다"며 막무가내다.

도대체 포켓 몬스터가 뭐길래.

문득 며칠 전 한국경제신문에서 읽은, 아이들이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빵을 산 다음 스티커만 갖고 빵은 버린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그뿐인가.

포켓 몬스터 바람을 타고 국내 라이선스 생산업체의 주가가 코스닥에서
연일 초강세를 보인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 회사는 지난해 59억원의 적자를 냈었는데, 올해는 포켓몬 덕에 벌써
80억원의 흑자를 내고 있다 한다.

포켓몬이란 한마디로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괴물"이라는 뜻의 일본식
합성어이다.

주인공 소년이 조그만 구슬 속에 여러가지 괴물을 담고 다니다 여차하면
그것을 꺼내 쓴다는 내용의 만화영화인데 "몬스터"란 말이 주는 어감과 달리
귀엽고 다양한 캐릭터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진원지인 일본에서는 일반 상품이나 완구는 물론 심지어 항공사인 전일본
공수(ANA)까지 비행기에 포켓몬을 그린 덕에 매출이 폭발적으로 신장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포켓몬은 원산지인 일본을 넘어 한국과 미국시장까지 휩쓸고 있다.

한 예로 얼마전 극장용 포켓 몬스터가 미국에서 개봉 첫날 1천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이런 수입을 올린 영화로는 미국 내에서도 "스타워즈"나 "식스 센스"
정도의 영화가 있을 뿐이다.

미국인들도 포켓몬 태풍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포켓몬의 힘은 캐릭터의 힘이다.

일본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원령 공주나 여러가지 전문용어를 갖추고 있는
공각 기동대 같은 만화에 비하면, 포켓 몬스터의 이야기 구성은 단순한
편이다.

오히려 영화적 완성도보다 아이들은 무려 1백51가지로 변신을 거듭하는
캐릭터의 무궁무진한 매력에 홀딱 반해버린 것 같다.

이쯤 되면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지브리 스튜디오 사장이
부산 영화제에 와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앞날은 어둡다. 창의력도 고갈돼
있고 인재들도 부족하다"고 탄식한 것은 필자가 보기엔 부잣집 곳간에 쥐
모인다고 한탄하는 수준인 것만 같다.

그러나 부잣집 곳간을 흘겨보며 샘내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다행히 아직은 척박한 한국 애니메이션계에도 점차 상서로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산 애니메이션인 "아기공룡 둘리"가 25만달러에 유럽으로 수출된 것이다.

이는 포켓몬 열풍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출발이다

왜냐하면 속성으로 개발돼 포장재료로만 쓰이는 캐릭터들과 달리 둘리는
만화책에서부터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상품으로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온
생명력이 있는 캐릭터요, 그만큼 미래의 잠재가치가 크다.

여담이지만 둘리를 그리기 시작한 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당국의 서슬퍼런
검열 때문에 작가가 말썽꾸러기 악동에서 아기공룡으로 캐릭터를 바꾸었다니
이것도 따지고 보면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요즘 한국영화가 연일 흥행에 성공하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란 말이
들려온다.

심지어는 "아시안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와 경쟁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문화상품 또는 영상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애니메이션과 캐릭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 특히 동물을 캐릭터로 한 만화의 속성 자체가 언어와
인종적인 이질감을 뛰어넘을 수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나오는 SF영화나 첩보영화보다는 아기 공룡 둘리에게서
더 친숙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제 아무리 전자제품과 자동차로 미국시장을 석권하던 일본도 결국 실사
영화가 아닌 포켓몬, 특히 피카추란 캐릭터 하나로 단숨에 미국시장을 점령한
것이다.

물론 이같은 성과는 단시일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난 30여년간 쌓아올린 탄탄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막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려는 둘리를 보호하고 또 다른 둘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캐릭터를 만드는 힘, 아마도 국제 무대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인지도를
높이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정부는 문화산업 육성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천명하는 것 못지 않게 "도와는
주되 간섭은 하지 않는" 정책을 실천해야 한다.

창작자들은 생명력 있는 캐릭터를 개발하고, 대중은 그것을 아끼고 키워주는
3인1각의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 kss1966@unitel.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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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강대 생물학과
<>고려대 심리학과 박사과정 수료
<>씨네21 영화평론 당선
<>임상심리전문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