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라모스 < 전 필리핀 대통령 >

아시아가 변하고 있다.

시장개방과 경제성장의 거대한 흐름이 아시아 권위주의 정권들을 뒤흔들고
있다.

개방과 번영의 물결속에서 민주주의의 ''불모지대''였던 아시아가 ''민주주의
신흥국''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안보"문제는 점점 더 중요한 이슈로 부각
되고 있다.

아시아 각국 경제는 한 세대전에 비해 크게 발전하긴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그 어느때보다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지역과 한반도, 대만해협은 정치.군사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들 당사국은 지금도 미사일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일부지역에서는 핵무장까지 이뤄지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재정권이 쓰러진 후 이제 막 피어나려던 민주주의가
분리주의와 사회적 갈등으로 짓밟히고 있다.

다른 국가들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개혁"을 외치다가 좀 살만해지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개혁의 꼬리를 내리고 있다.

경제위기 후 아시아의 빈부격차는 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각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층은 위기후 부와 권력을 회복했지만 빈민층은
15년전 수준으로 소득이 떨어져 빈곤과 고통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다.

경제위기 이후 아시아의 사회적 불안요소는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아.태경제협력체(APEC)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사회적 안보나 정치문제는 도외시한 채 경제문제에만 매달리고 있다.

경제문제도 당장의 핵심 현안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지난 3년간 APEC에서 나온 뉴스들을 보면 무역 및 투자 자유화나 경제.기술
협력 문제 등 눈앞의 경제 현안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지난해에는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이 말레이시아를 방문, 투옥돼 있던
말레이시아 부총리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해 뉴스거리가 됐다.

올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서도 뉴스의 초점은
경제현안보다는 동티모르 문제였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치문제와 경제현안을 별개로 다룰 수 없는 현실이 가장 큰
이유다.

과거에는 민주적 지배체제나 정치적 안정, 유능한 정부가 없어도 경제성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단계에서 벗어났다.

정치적 안정과 안보문제를 벗어나서는 장기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논의할 수
없게 됐다.

물론 APEC의 역할과 임무를 바꾸자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APEC은 무역과 투자, 금융안정 문제를 좀 더 심도있게 논의해야 하며
또 그 위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APEC이 경제문제에만 매달려서도 안된다.

정치.사회적 안보 문제들도 다뤄야 한다.

21세기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기구가 돼야 한다.

APEC은 지금 실질적인 역내 정치.안보 회의체로 자리잡았다.

오클랜드 회의때 정상들이 동티모르 사태에 개입키로 결정한 것이 좋은
예다.

APEC에서 정치이슈를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그동안 여러차례의 정상회의중 회원국 지도자들은 경제와 정치, 안보적
이슈에 대해 각국별로 쌍무협상을 벌였다.

공식적으로 APEC에는 두가지 의사결정 라인이 있다.

역내 재무 및 통상장관들이 회담을 갖고 실질적인 경제협력문제를 논의한다.

그런 다음 장관회담 내용을 정상회담에 올려 최종 확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경제적 현안들뿐 아니라 정치.안보문제들도 광범위하게 다뤄진다

이 때문에 APEC에서는 재무장관회의의 범위를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경제문제를 다루는 APEC에서 "구색맞추기"차원으로 정치.안보 문제를 다룰
게 아니라 외무장관들도 참가시켜 정치.안보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해야
한다.

21세기를 맞아 APEC은 정상회담을 뒷받침하는 3개분야에서 각료회의가
열려야 한다.

재무분야, 투자 및 교역분야, 정치.안보분야 회의등이 그것이다.

이 분야의 회의들이 별도로 개최된 후 각 회의의 결과를 정상회담에서
종합적으로 다루면 된다.

지금은 역내 문제들을 논의하는 회의라고는 1년에 한번밖에 없다.

혹자는 정치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APEC의 설립취지를 흐리게 할 뿐이라며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재무.통상장관들의 결정사항은 정치문제로 희석되는게 아니라 외무장관들의
합의사항에 의해 뒷받침 될 것이기 때문이다.

APEC에서 정치문제를 다루는 데는 아직 중국과 대만간 관계정상화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지만 APEC을 아.태경제협력 및 정치.안보협력체(APSPEC 또는 APEX)로
발전시켜 나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 박수진 기자 parksj@k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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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시아위크 최근호(11월12일자)에 실린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기고문을 정리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8일자 ).